숨소리조차 조심해야 했던 시간

도망갈 곳이 없을 때 견뎌야 하는 법

by 내이름은

아빠는 엄마의 투병 생활이 길어지면서, 마지막 즈음에는 여자들을 만났던 것 같다. 너무 어려서 기억은 안 나지만, 엄마 병문안 후에 아빠가 "엄마 친구"라면서 만났던 머리가 엉덩이 끝까지 내려오는 아줌마의 뒷모습이 생각난다.


엄마가 돌아가신 지 얼마 안 돼서 아빠는 우리에게 보여줘서는 안 될 모습들을 보여줬다. 우리 집 거실에서 낯선 아줌마랑 누워서 TV를 보고 있었다. 그 이후로는 정식으로 소개팅(?)을 하셔서 날 데리고 새로운 엄마가 될 아줌마들과 소개팅을 하셨다. 이건 나도 이해하지만, 그 이전의 비정식적인 만남은 ‘아빠’라는 사람에 대해 크게 실망하게 된 계기였다.


그렇게 아빠는 소개팅을 열심히 하다가 결국엔 우리가 전혀 모르는 어떤 아줌마와 마음이 맞아서 재혼을 하셨다. 언니랑 나랑 6살 차이, 내가 11살 즈음, 언니가 17살 즈음 되던 해에 아빠는 재혼을 했다. 엄마가 돌아가신 지 내 기억엔 1년 안 됐으려나, 1년 됐으려나… 그 시기 즈음에 재혼을 하셨고, 나이가 꽤 있던 언니에게도 보여주지도, 설명하지도, 본인 형제들에게도 이야기 없이 갑자기 재혼식을 했다. 훗날 큰엄마에게 듣기로는 ‘상견례’라고 해서 갔더니 그게 재혼식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아빠의 급한 재혼식은 우리에게 큰 상처가 되었다.


새엄마의 첫인상은 진한 향수 냄새와 칼같이 자른 보브컷 스타일의 도시적인 여자였다. 나는 새엄마가 예쁘다고 생각했고, 좋아했다. 내가 예쁘다고 칭찬하자, 새엄마는 말했다. "남자들은 나 같은 스타일 안 좋아해~"


그저 사람이 그리웠는지, 나는 새엄마가 좋았다. 그리고 새엄마에겐 딸도 있었다. 그 언니는 나보다 3살 많은 언니였다. 재혼을 하고 겪은 변화는, 나를 1~2학년 때 알던 남자애가 나한테 질문을 던졌을 때였다.


"너, 언니 한 명이었잖아? 왜 두 명이 됐어?"


나는 그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마냥 새엄마가 좋았다. 예쁘고 세련된 새엄마. 거부감도 없이 새엄마를 맞이했다. 너무 잘해줬기 때문에. 그러나 친언니는 새엄마를 거부했다. 상을 뒤집어엎고 집을 나갔다. 아빠가 실직하면서, 새엄마의 태도는 달라졌다. 나에게 친절하던 새엄마는 온데간데없고, 차갑게 대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돌변한 새엄마는, 그 모습 그대로 쭉 이어졌다. 나는 성인이 되고 나서도 3~4년간 새엄마랑 지냈고, 친언니는 20살이 되던 해에 집을 나갔다. 아빠는 우리의 슬픔을 헤아리기보단, 새엄마가 도망갈까 봐 붙잡기 급급했다. 다시 생각해봐도 역겨운 지점이다.


아빠의 말로는 “우리를 돌봐줄 사람이 필요했다”고 한다.


나는 새엄마와 새언니 사이에서 불편한 유년 시절을 보내야 했다. 새엄마와 새언니는 거의 매일 싸웠고, 나는 그 광경을 매일 마주해야 했다. 새엄마는 새언니에게 이혼한 전 남편을 언급하며 “니 아빠 닮았다”며 폭언과 욕설, 그리고 주변 물건을 집어 던지는 폭행까지 했다. 새 언니도 지지 않고 맞서 싸웠다. 그야말로 지옥이 따로 없었다.


아빠가 말한 “우리를 보살펴줄 사람”이 이런 사람이었을까?


새엄마는 집 안에서 돌아다니는 내가 꼴 보기 싫다고 도시락을 싸줬고, 학교가 끝나면 집에 오지도 못하게 했다. 곧장 도서관으로 가서, 도서관 마감 종소리가 울릴 때까지 있다가 와야 했다. 10분이라도 일찍 오는 날이면, “마감 종소리 듣고 나와야지 왜 일찍 왔냐”고 혼났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왜 곧이곧대로 그 말대로 했는지 의문이다.


새엄마와 새언니는 사이가 좋다가도 나쁠 땐 서로 죽일 듯이 싸웠고, 둘이서만 등산을 가거나 하는 사진을 보면 엄청난 소외감이 들었다. 새엄마의 엄마가 온 날에는, 그 할머니가 거실에서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쟤는 왜 나와서 이야기 안 해?” 내가 거기에 껴서 대화할 틈도 주지 않고선, 자기들끼리 내 뒷담을 했다.


중3 때는 집안 환경과 학교에서도 소외감을 느끼면서 “학교에 가기 싫다”고 말했고, 정신과에 가고 싶다고 해서 정신과를 다녔다. 그러면서 새엄마와 살짝 가까워지는 듯했으나, 성인이 되고 나서는 억울함과 반항심이 올라왔다.


같은 집안에 있으면서 불편하게 만드는 새엄마가 너무 싫었다. 주방 기구들을 부술 듯이 다루면서 방 안에 있는 나에게 들으라는 듯이 굴었고, 버텨야 했던 나는 이어폰을 꽂았다. 싸우는 날엔 집을 나가라고 했고, 우린 같이 집 안에 사는 사람들이라고 하면서 대화를 전혀 안 했다. 냉장고에 있는 반찬도 먹지 말라고 했다. 머리를 감아도 머리에서 냄새가 난다고 더 세게 문질러서 닦으라고 했다. 아무리 세게 문질러도 계속 그말을 하기에 미용실에 갔을 때 물어봤더니 미용사가 그렇게 세게 문지를 필요가 없다고 오히려 좋지 않다고 해서 그날 부터 세게 문지리는 것을 멈췄다.


어린 시절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새엄마는 공포 그 자체였고 다가갈 수도, 다가가고 싶지도 않은 사람이었다. 친구가 집에 놀러오는 건 꿈도 못 꿀 일이였고 친구들도 다 새엄마를 무서워했다. 수화기 넘어로 소리지르는 엄마 목소리를 들었기 때문일거다.


그러고선 자기가 아플 때 위로해주지 않는다고 또 뒷담을 했다. 너무 무섭고 어려운데, 뭘 어떻게 다가가라는 건지. 얼음장처럼 차가운 사람이었다.


용돈 한 번 받아본 적이 없어서, 버스비로 준 걸 아껴서 걸어 다니면서 그걸 용돈으로 쓰면 그것조차 “왜 그렇게 쓰냐”고 혼났다. 문제집 살 돈을 받아서 잔돈을 받으면 10원까지 세어가며 돈이 비는지 확인했다. 밥 먹던 상을 접어 놓을 때도 다리 쪽이 바깥으로 보이면 혼났고, 모든 게 본인이 해놓은 대로 되어 있지 않으면 난리가 났다.


실수도 용납하지 않았다. 욕실에 있던 장화에 물이 들어갔다고 내 머리에다가 장화를 집어던졌다.

“장화가 있으면 밖으로 빼고 샤워를 했어야지.” 하면서.

모든 물건을 만지고 나면, 정해진 방향대로 놓지 않으면 혼났다.
그걸 완벽하게 놓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결국엔 나중엔 본인 방에 자물쇠를 걸고 다녔다.
지금 생각해 보면 새엄마는.. 정신병자였던 것 같다.
내가 뭘 훔쳐간 적도 없는데 뭐가 그렇게 싫었던 걸까.


그 지옥 같던 생활을 견디다가 23~24살 즈음에 독립을 했다. 10살 때부터 그때까지 참고 함께 살았다.


항상 집이 싫었고, 친구 집에서 전전했다. 독립도 준비 없이 해서 너무 힘들었지만, 독립하지 않으면 내 정신 건강이 무너질 것 같았다. 더 빨리 독립했으면 좋았겠지만 아빠는 항상 새엄마 뒤에 숨어 있었고 새엄마가 돈 관리한다고 우리에게 어떤 지원도 해주지 않았고 새엄마의 허락하에만 우리에게 돈을 썼기에 이른 독립을 할 수 없었다.


이 글을 쓰면서도,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그 어린 나이에 그런 시간을 견뎠다는 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하다.




그 모든 시간이 있었기에 지금 이렇게 꺼내어 쓸 수 있는 이야기가 생겼다는 사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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