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금요일, 박원순 서울시장이 세상을 떠났다. 애통함, 황망함, 안타까움... 죽음 앞에서 과연 어떤 표현이 충분할까. 실종부터 주검의 발견, 빈소로의 안치와 영결식까지 전국에 생중계되는 과정에서 치열한 갑론을박이 이뤄졌고, 고인과 고소인에 대한 혐오가 뒤엉키면서 국민들의 정서는 분열되었다.
서울시청 광장에 마련된 시민 분향소(출처: TBS)
이것은 미투가 아니다
미투(me too)란, 공소시효가 지나서 조사가 이뤄질 수 없거나 물적 증거가 불충분한 경우, 당사자의 목소리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성폭력 피해 증언 운동이다. 단어에서 알 수 있다시피, 약자의 위치에 놓인 피해자들이 ‘me too’ 즉, ‘나도 겪었다’, ‘넌 혼자가 아니야’라는 연대의 목소리로 남성 중심의 거대담론에 저항하는 것이다. 이 운동을 통해 무분별하게 일어나던 성희롱, 성추행과 같은 일상적 범죄를 근절하는 패러다임이 만들어졌고, 피해자도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근본적인 인식 변화가 생겨났다.
미투 운동의 역사와 주요 쟁점을 담은 《미투의 정치학》(출처: 교양인 출판사 티스토리)
분명 미투의 한계는 존재한다. 대부분 시간이 지난 일이거나 증거가 부족해 본격적인 수사로 이어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사실관계를 파악하기도 전에 가해자 프레임이 견고하게 만들어져, 인민재판 격의 상황이 생기기도 한다. 이른바 ‘미투 당했다’라는 식의 항변은 이 맥락에서 등장한다. 어떤 불순한 목적을 가지고 누군가의 위신을 깎아내리려고 하거나 사회적으로 매장시키려고 할 때 미투를 무기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故박원순 시장의 죽음에도 어김없이 ‘미투가 원인이다’라는 이야기가 우후죽순 나왔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이것은 미투가 아니다.이것은 한 지자체장의 성폭력을 고소한 사건이다. 언론에 보도된 바에 따르면, 고인의 실종이 있던 날의 바로 전날에 4년 간 지속된 성희롱과 성추행에 시달렸다는 증거와 증언이 담긴 고소장이 접수되었다. 물론 법적인 고소를 한다고 해서 그것이 모두 사실인 것은 아니다. 절차가 존재한다. 고소장이 접수된 이후 범죄의 혐의가 의심되면 곧바로 피의자로 전환되고, 수사와 기소가 이뤄진다. 이 사건의 경우 대화 내용과 사진 등이 증거로 제출되었다는 점에서 기존의 미투와 결이 다르다. ‘피해자 말이 무조건 옳냐’는 식의 반(反) 미투식 공격은 이 경우 적용되기 힘들다는 것이다. 법적 절차에 따라 고소인의 호소가 옳고 그른지 충분히 판단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모론은 수그러들 기세를 보이고 있지 않다. 여권을 무너뜨리려고 하는 세력이 배후에 있다던지, 고소를 부추긴 집단의 의도가 불순하다던지. 그러나, 분명한 것은 고소 과정에 어떤 이해 관계자들이 결부되었는지를 떠나서, 엄연히 ‘피해자’가 존재하고, 그 피해를 당한 바 있다는 사실을 주장으로 한 사건이라는 사실이다. 게다가 일부 언론 보도에 의하면, 고소장이 접수된 당일 밤에 시 당국자들의 대책회의가 열려, 사퇴까지 제안된 것이 아니냐는 주장이 있다. 만약 사실이라면 고소장에 담긴 내용이 일으킬 파장이 상당하리라 예상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故박원순 시장의 유서를 공개하는 관계자(출처: YTN)
검찰사건사무규칙 제69조에 따르면, 수사받던 피의자가 사망할 경우 검사는 ‘공소권 없음’으로 사건을 불기소 처분하게 되어있다. 이렇게 故박원순 시장은 영원한 피의자로 남게 되었고, 피해자는 영원한 피해 '호소인'이 되었다. 너무나도 슬프고 애석한 일은, 떠난 이는 말이 없고 갈등은 온전히 국민의 몫이 되었다는 것이다. 사법적인 절차는 법대로 공소권 없음으로 종결일 테지만, 5일에 걸친 서울특별시장(葬)에 대한 논란이 보여준 바는 그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故박원순 시장의 공을 기억하고, 그를 응원하고 지지하던 시민들의 애도를 무시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번 사건이 일부 지지자들에게 더 큰 충격으로 다가오는 것은 그가 직장 내 성추행 사건을 변호하던 인권 변호사 출신이라는 점 때문일 것이다. 특히 여권에서 애도 기간임을 들어 고인의 성폭력 의혹에 대해 금기처럼 쉬쉬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이는 성대한 장례식과 맞물려 상황을 적당히 덮으려는 것으로 오해받을 여지가 있다.
성폭력 의혹에 대한 당 차원의 입장을 묻는 기자에게 “후레자식”이라고 해 논란을 빚은 이해찬 대표(출처: news1)
장례식은 끝이 났고, 남은 자들에겐 할 일이 있다.
첫 번째, 피해자의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듣겠다는 정치권 차원의 약속이 있어야 한다. 법적으로는 공소권이 없지만, 사실관계를 정확히 파악하고 이와 같은 사건이 재발하지 않도록 하는 제도가 반드시 마련되어야 한다.
두 번째, 이를 위해서는 비정상적으로 폐쇄적이고, 힘이 지나치게 집중된 지자체장의 권력 구조를 성찰해야 한다. 이와 같은 사건이 발생한 것은 이번이 처음도 아니고, 이번 정권 만의 일도 아니다. 이념과 정권을 막론한, 오랜 시간 누적되어 왔던 위력 성범죄는 근절되어야 마땅하다.
마지막으로, 국민에 대한 사과가 있어야 한다. 故박원순 서울시장은 당과 개인을 지지하는 국민이 선출한 권력이었다. 죽음으로 인한 무책임한 공백이 국민에게 얼마나 큰 상처가 되는지 정치권 모두가 책임의식을 느끼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다는 국민 차원의 사과와 약속이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