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실에서 아이와 둘이 나란히 앉아 책을 읽고 있던 참이었다. 남편이 물을 마시러 주방으로 갔다가 어둑한 주위를 한번 둘러보더니 주섬주섬 무언가를 들추기 시작했다. 주방 아일랜드에 붙어있는 아이 책장 위에 놓인 책들과 학교에서 받은 각종 안내장, 영수증 같은 것들이었다. 낮에 청소를 하면서 모아두고서는 정신없이 아이를 데리러 가느라 버리는 걸 깜빡했다.
‘아까 나갈 때 버렸어야 했는데...’라고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는데, 잡동사니들을 다용도실 분리배출 상자에 놓아두고 돌아온 남편이 이번에는 냉장고를 열어 한번 쓱 훑더니 말한다.
“유통기한 지난 양념 같은 건 좀 버리지?”
순간 생각했다. ‘아니, 발견한 사람이 버리면 되잖아?’ 다툴까 봐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남편이 집안일에 아예 손을 놓고 있는 것은 아니다. 워낙 귀하게 자라 뭘 해도 어설프던 남편은 처음엔 신혼 초 사랑의 힘으로, 나중에는 아이가 생기면서 상황 상 서서히 집안일에 적극 동참했다. 5년이나 해외에서 지내면서 혼자 살림을 꾸린 경력(?)도 있다. 어떤 면에선 나보다 더 꼼꼼하게 잘한다는 것이 친정 엄마의 냉정한 평가다.
문제는 살림을 내 일이라 여기기보다는 도와준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남자들 대부분이 마찬가지 아닐까? 다 마른빨래를 걷어놓으면 그 곁을 스쳐 지나갈 뿐 결코 자발적으로 개지 않고, 요리를 하는 건 좋은데 이런저런 양념이 어디 있는지 일일이 물어보고, 아이 등원시킬 때면 이미 일러준 내용을 처음부터 끝까지 직장에 있는 아내에게 전화로 다시 물어본다.
그런 그와 많이 다투고 또 화해하면서 서로 맞춰가는 중이다. 함께한 세월이 10년이 다 되어가지만 우리에겐 5년이라는 생활의 공백이 있고 심정적으로나 학습된 경험상 알지만 오랜 습관이 여전히 작용해 익숙한 데로 행동하고 아차 하게 되는 순간도 숱하게 많다. 정리가 정말로 어려운 나와, 정리를 해 보지 않은 그가 만나 함께 정리가 일상인 살림을 살아가는 중이다.
이제 그도 분명 많은 일들을 나의 가이드나 손길 없이 익숙하게 처리하고 있다. 전혀 변할 것 같지 않고, 또 지금도 예전의 모습이 자주 튀어나오는 남편이라 간혹 짜증을 돋울 때가 많지만 분명 그는 달라지고 있다. 어쩌면 변하지 않는 것은 도리어 내 쪽인지도 모른다. 어차피 다 내가 할 일인데 여기며 귀찮음에 얼른 하고 치우면 될 일을 미적거리고 있는지도.
주변을 둘러보니 짐들이 곳곳에 보인다. 휴직을 하고 싹 정리하기로 별렀던 짐들이다. 집안 곳곳에 쌓인 장난감과 잡동사니들 때문에 아무리 집을 치워도 깔끔해 보이지가 않는다. 큰 물건들은 친한 지인에게 나눔 하고 중고거래 사이트에 올리거나 유료 폐기하고 안 입는 내 옷들도 일부 과감하게 버렸다. 근처 아름다운 가게에 기부하기도 했다.
틈틈이 물건을 치우다 그만 두기를 반복하며 획기적인 변화 없이 휴직 8개월 차를 맞았다. 자기는 정리하지 않으면서 훈수만 두길 좋아하던 남편은 내가 버리길 깜빡한 잡동사니들을 이제 스스로 다용도실에 가져다 놓는다.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식사 후 설거지가 끝나면 또 그것을 아파트 분리배출 장에 내다 버리기까지 한다. 내가 원하는 속도는 아니라도 그는 변했다.
들고 있던 책을 다 읽어주고 아이가 다른 놀이를 하려고 자리를 뜬 사이, 냉장고로 가서 양념 병을 싹 꺼냈다. 내용물을 비우고 물을 넣어 흔들어 씻었다. 병에 붙은 라벨을 떼어냈다. 잔소리를 듣는 순간은 분명 기분이 별로였지만 비워진 냉장고를 보니 말끔해졌다. 다음 날 저녁 그는 그 병들을 분리배출 장으로 가지고 내려갈 것이다. 이렇게 하나씩 우리는 서로의 부족한 점을 조금씩 채워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