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에 알게 된 취미의 놀라운 힘
등굣길, 아이 손을 잡고 학교로 향했다. 학교 담벼락으로 이어지는 골목에 들어서자마자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월광 제3악장이 들려왔다. 어디서 나는 소리일까 고개를 들어보니 2층에 자리 잡은 음악학원의 열린 창이 보인다. ‘이른 아침부터 문을 여네?’ 생각하며 가던 길을 재촉해 학교 앞에 도착, 잘 다녀오라고 아이에게 손을 흔들어주고는 길을 되돌아 내려왔다.
하교 길, 유려한 피아노 소나타는 아이들이 내는 서툰 음색의 불협화음으로 바뀌어 있었다. 어린 시절 연습했던 곡이 그 사이로 들려왔다. 반가운 마음에 아이에게 “저거 엄마가 예전에 쳤던 곡이야.” 라고 말해주었다. 길을 수차례 오가며 피아노 소리에 자꾸만 마음이 부풀던 어느 날, 아이와 함께 레슨을 시작했다. 아이는 처음, 나는 피아노를 그만둔 중3 가을 이후 28년만이었다.
수업 첫날, 원장님은 예전에 어디까지 배웠는지 물으셨다. “체르니 50 치다가 그만 뒀어요.”라고 말하자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체르니 30과 소나티네 교재를 가지고 오셨다. 표지에는 낯설지만 예쁜 여자아이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조금은 미안하고 또 고마운 마음으로 페이지를 펼쳐 건반 위에서 손을 움직여보았다. ‘이것쯤이야 우습죠.’ 속으로 중얼거리며 연주를 시작했는데, 왕년에 축구 좀 했다더니 헛발질만 남발하는 조기축구회 신입회원처럼 손과 마음이 따로 놀았다. ‘어어, 이게 아닌데.’
저만치 앞서나간 마음을 느린 손이 부지런히 따라가다 보면 1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간다. 하루 종일 피아노만 치라고 해도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어린 시절에는 지겨워하며 마지못해 치던 체르니와 소나티네의 연습곡들이 이렇게 아름다운 걸 나이 마흔 넘어서야 알았다. 예전처럼 빠르진 않지만 내 손이 만들어내는 리듬과 선율에 빠져 있다 보면 학원 문에 달린 종소리가 딸랑딸랑 울리며 쿵쿵거리는 발소리들이 몰려온다. 요즘 코로나로 인해 일부 학년들이 온라인 수업을 하다 보니 학원에 일찍 온 아이들과 마주치는 것이다.
아이들은 미닫이문을 열어 내 곁에 앉은 원장님에게 꾸벅 인사를 건네고 오늘 나갈 진도를 확인받는 틈틈이 나를 쳐다본다. 수시로 원장 선생님을 찾아오면서 선생님으로는 보이지 않는 저 어른이 누군지 또 무엇을 치는지 힐끗 보면서 궁금해 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나도 그 아이들을 의식하며 아까 손가락이 꼬인 부분을 또 실수하지 않으려고 바짝 긴장한다. 원장님이 다른 아이의 연습을 위해 자리를 비운 사이, 연습 검사를 받으러 온 한 남자아이는 내가 누군지 궁금해 하면서 물었다. “그런데 어른이 피아노는 왜 배워요?”
나이 들어서 배우는 피아노의 의미
요즘 주변을 둘러보면 같은 세대에 속한 지인들이 무언가를 새롭게 배우는 모습을 자주 접할 수 있다. 몇 년째 그림책으로 인연을 이어오고 있는 분은 올해 초 비올라 레슨을 시작했다. 올해 말 모임에서 크리스마스 캐럴을 연주하는 게 꿈이라고 종종 말씀하신다. 제빵 기술을 배운 이는 직접 만든 빵을 선물하다가 빵집을 차렸다. 누군가는 꽃을, 또 다른 이는 외국여행을 대비해 영어를 배우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중년의 우리는 왜 이렇게 무언가를 새롭게 배우려는 것일까?
생애주기의 발달단계를 연구한 학자들은 중년을 젊은 시절의 꿈과 현실의 괴리를 인식하며 인생목표를 재평가하는 결정적 시기로 여긴다. 노화가 시작되면서 생물학적, 심리적 변화가 일어나는 40대는 과거와 현재를 돌아보고 사회적 자아와 실제 자아의 불균형을 처리하며 새로운 단계를 준비하는 생애 발달적 혼란기의 시작이라고 한다.
20대의 불안하고 막막함, 30대의 치열함을 넘어 일에서나 육아에서 안정을 찾아가고 있지만, 문득 거울을 들여다보면 그때 꿈꿨던 자신과 다른 낯선 얼굴이 나를 마주하고 있다. 잘한 건 잘한 데로 아쉬운 건 또 아쉬운 데로 과거에 품었던 꿈과 지금의 괴리를 부정할 수 없다. 몸과 머리 회전은 예전 같지 않은데 노년의 변화가 시작된 중년, 더 늦기 전에 예전에 진정한 나를 찾고 싶은 욕구를 강하게 느끼게 된다.
게다가 지금은 개인을 강조하는 시대이다. 자아실현을 행복의 목표로 외치는 현대사회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일은 쉽지 않다. 목표를 세워 뭔가 배우고 이루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은 강박이 든다. 많은 사람들이 무엇이 나를 기쁘게 하는지 곰곰이 생각하고 찾기보다는 사회적 자아에 맞춰 남들이 하고 있거나 하면 좋다는 것을 따라 새해 목표를 세우고 한해를 보내는 이유다. 나의 30대도 마찬가지였다. 능력 있는 직장인, 아이를 잘 키워낸 엄마가 되고 싶어서 늘 읽던 소설 대신 자기계발서와 육아서적을 펼쳤고, 재테크 강의를 기웃거렸다. 하지만 그런 방황도 자신을 알아가기 위해 필요한 과정이 아니었을까?
마흔에서야 진짜 하고 싶은 일을 발견했다. 20대부터 꿈꿨지만 쓸모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뒷전으로 미뤄둔 글쓰기였다. 사회적 역할에 매진하느라 나를 탈탈 털어 소진한 덕분에 오히려 마음 속 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었다. 쓰고 싶던 글을 마음 편안히 쓸 수 있는 온라인 모임을 운 좋게 만나 3년째 이어오고 있다. 올해는 육아휴직을 맞아 그동안 읽고 소개해 왔던 그림책을 직접 써 보기로 결심하고 꾸준히 쓰고 있는 중이다. 학창시절이나 업무를 위해 대학원을 다닐 때 보다 더 열심히 관련 강의를 듣고 매일 일정시간 동안 그림책 원고를 쓰려 노력하고 있다.
어른이 피아노를 왜 배우냐고 묻던 아이에게 어른은 더 이상 무언가를 배우지 않아도 되는 존재라고 여겼을까 아니면 피아노를 배우는 것이 의외였을까? 며칠 동안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사실 주변사람들에게 아이의 한 달 학원비를 상회하는 비용, 결과를 따져보아도 도대체 어떤 효용이 있을까 싶어 피아노를 배운다고 선뜻 말하기 어려웠다. 비용 대비 효율로는 아이에게 다른 걸 하나 더 가르치던가, 나의 역량을 높일 수 있는 자격증 강의를 듣는 게 더 현명했다. 왜 굳이 돈도 자격증도 되지 않는 체르니와 소나티네를 배우고 싶었던 것일까?
피아노 학원을 다니기로 마음을 먹은 것은 클래식 음악을 좋아해 온 개인의 취향도 한몫 했지만 글을 쓰기 위해서였다. 글을 쓰는 일은 체력 소모가 커서 많은 사람들이 체력단련을 위해 운동을 한다. 나에게도 영감을 주는 동시에 연습으로 한 단계 한 단계 성취감을 누릴 수 있으면서 생활 전반에 긍정적인 에너지도 얻을 수 있는 활동이 필요했다.
마침 매일 수차례 오가는 길에서 들려온 피아노 소리가 오래 전의 경험을 떠올리게 해주었다. 한창 학업에 열중해야할 중3때까지 나는 피아노 레슨을 다녔다. 성적으로 가치가 매겨지는 학교와 학원을 벗어나 숨 쉴 수 있는 공간이 연습실이었다. 그곳에서 기호에 불과한 음표가 내 손과 해석을 통해 아름다운 음악으로 바뀌는 마법을 경험했고 연습한 만큼 어제보다 나아지는 힘을 배웠다. 학생이라는 사회적 역할에 앞선 자유로운 개인으로 잠시나마 존재할 수 있었고 그 순간만은 역할이 아닌 의미로 존재하는 기쁨을 누렸다.
그리고 수십 년이 지나 일과 육아로 앞만 보고 내달리던 인생의 트랙에서 잠시 빠져나와 두 번째 꿈을 좇으려는 마흔의 지금, 무의식적으로 그때 경험한 자유로움과 충만감을 쫓아 피아노 레슨을 선택하게 된 것이었다. 돈과 효용의 법칙으로 매길 수 없는 순수한 기쁨을 매주 2회 1시간 동안 한껏 누리고 몸과 마음이 충전되어 돌아온다. 지금 새롭게 시작하고 배울 수 있는 현실에 감사하고 하고자 하는 일에 더욱 집중하게 된다. 손과 마음이 따로 놀긴 하지만 야금야금 나가는 진도 또한 뿌듯한 나만의 작은 성취다.
정신건강의학자 문요한 작가는 작년 출간된 오티움(살아갈 힘을 주는 나만의 휴식)에서 그는 우리의 몸과 마음은 균형이 맞아야 하며 그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는 막연하게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쉼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배우는 기쁨을 통해 만족을 경험하는 여가-오티움-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오티움은 일반적인 취미 중독과 달라 일상생활에 악영향을 미치지 않고, 오히려 시너지가 되어 오티움을 통해 얻은 에너지로 본업에 긍정적인 에너지로 작용하는 선순환을 일으킨다. 내게 있어 피아노를 배우는 일은 본격적인 창작활동으로서의 글쓰기와 가정주부라는 본업에 활력을 일으키는 일종의 오티움이었던 것이다. 오티움이 여가로 머물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에게 맞는 오티움을 찾고 심화시켜나가면서 꾸준히 갈고닦아 전문가 수준에 이를 수도 있다고 한다.
나를 비롯해 지인들의 새로운 배움 또한 각자 사회적 역할에 매진하느라 미뤄두었던 내면의 욕구에 귀 기울이며 자신만의 오티움을 발견해가며 두 번째 꿈을 꾸는 탐색의 과정이 아닐까? 생애주기에 맞춰본다면 마흔 이후의 시간은 지금, 여기 나를 돌아보며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좁히고 인생구조를 조정해나갈 수 있는 최적의 시기다. 이미 다양한 경험을 통해 자신이 할 수 있는 것과 하고 싶은 것들을 잘 알고 있고 어느 정도의 안정이 이런 과정을 부양할 뒷받침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원장님이 인쇄한 악보를 하나 가져와 물었다. “이 곡 한 번 쳐 보실래요?” 영화 <라라랜드>의 OST ‘Another day of sun’이었다. 한 아이가 이 곡을 치고 싶어서 악보를 구해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감각적인 선곡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덕분에 나도 좋아하던 영화의 배경음악을 연주할 수 있게 되었다. 곡을 완성한 날은 기념으로 동영상도 찍어두었다. 그 어린이 덕분에 꼭 연주해보고 싶었던 피아졸라의 ‘Adios Nonino’를 쳐 보고 싶다고 용기를 내 악보를 요청했다. 더디게 진도를 나가고 있지만 언젠가는 멋지게 연주할 날을 꿈꾼다.
얼마 전 4-50대 신 중년을 위한 배움 센터가 세워졌다는 소식을 우리 구 소식지에서 접했다. 교육프로그램을 살펴보니 생애전환기 새로운 직업을 찾기 위한 실용 기술 교육 뿐만 아니라 진정한 자아 찾기를 위한 인문학, 독서치유 강좌도 함께 개설되어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평생 적성이나 기호와 무관하게 자기실현의 압박 아래 사회적 역할에만 충실해 온 많은 중년들이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진짜 하고 싶은 일을 고민해 보고, 가벼운 취미부터 제2의 삶을 위한 기술까지 다양한 배움에 도전하고 새로운 시작을 열어갈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마련되어 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동안 사회적 자아에 매몰된 채 앞만 보고 달려왔던 중년들이 찐 자아를 찾을 수 있는 다양한 배움의 기회가 더 다양해졌으면 좋겠다. 어린이들의 눈에도 엄마나 선생님이라는 역할 대신 늘 새롭게 무언가를 탐색하고 배우고 도전하는 중년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여겨지는 사회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