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어르신들이 그렇지만 나의 시어머니에게는 했던 말을 또 하는 습관이 있다. 결혼 초기에는 남편을 비롯해 새로운 가족에게 궁금한 것이 많았기에 그 이야기에 귀를 쫑긋 기울이고는 했다. 하지만 좋은 이야기도 계속 들으면 질리는데 두서없이 시작해 자식 자랑과 자신의 삶에 대한 예찬으로 끝맺는 패턴의 이야기를 수십 번 되풀이해서 듣는 일은 점점 곤혹스러워졌다.
결혼 9년 차, 한 이야기 당 3-40번은 족히 넘어 들어왔기에 웬만한 이야기는 어느 정도 외우는 수준에 이르렀다. 같은 이야기라도 어머니의 기분과 의지에 따라 디테일이 조금씩 바뀌며 결국은 같은 메시지로 이어진다는 걸 알아챈 뒤부터는 적당히 듣다가 클라이맥스가 오면 추임새를 넣는 방식으로 나의 듣기 요령도 늘어갔다.
어머님의 레퍼토리는 다양한데 그중에서도 ‘에이, 설마 진짜? 그럴 리가...?’라고 느끼게 만드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어머님의 처녀 시절, 친구들과 계모임으로 처음 중국집에 갔다가 당한 사기(?) 사건이다. 말씀인 즉, 아무것도 모르는 시골 처녀들이 ‘숭악한(흉악한의 경상도 사투리)’ 도시 사람에게 코 베인 일이라고 한다.
열 명 남짓의 시골 처녀들은 주머니에 두둑히 돈도 있겠다, 약간 들뜬 마음이었는지 평소 말로만 들었던 ‘탕수육’을 먹어보기로 대범한 결심을 했다고 한다. 탕수육이 어떤 음식인지 모르는 이 천진한 처녀들은 각 1 탕수육을 시켰고 결국 테이블 한 가득 열 그릇의 탕수육이 나왔다는 다소 시트콤 같은 이야기다.
이야기의 끝은 늘 순진한 처녀들을 속인 당시 중국집 사장의 야박함에 대한 원망으로 마무리된다. 세월 덕분인가 그 원망은 매우 옅고 가볍다. 그래서인가 사실 지난 9년 간 어머님의 ‘탕수육 사건’의 전말을 들을 때마다 ‘설마 그랬을 리가 있을까? 탕수육을 열 그릇이나 시키면 이상해서라도 분명 말을 해 줬을 텐데.’ 하는 게 진짜 내 속마음이었다.
굳이 어머님이 꾸며낸 이야기를 할 필요도 없었을 테니까 진짜 있었던 일이 맞겠지만 생생한 전달에도 불구하고 그 사건은 어딘가 과장된 것만 같은, 히트를 노리고 각색한 라디오 사연 같은 해프닝 같은 인위적인 느낌으로 들리고는 했다. 동시에 의문도 들었다.
‘아니, 어떤 음식인지 물어보지도 않고 그냥 시켰다고? 그리고 그 사장은 양을 알 텐데 주문을 그대로 받았다고? 그게 말이 돼?’
그런데 어머님을 겪으면 겪을수록 그 일이 사실일 수도 있었겠다 싶은 생각을 하게 된다. 어머님은 나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알고 수시로 가르쳐 주려고 하시는 분이지만 종종 너무 천진한 면을 자식들에게 드러내시기 때문이다. 어른은 어른다워야 한다는 나의 고정관념을 결혼 후 어머님을 겪으면서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어머님은 내가 직접 겪었거나 책으로 접한 세계의 여자 어른들과 결이 다른 사람이었다. 기본적으로는 천진함과 순박함을 지녔기에 주어진 것에 순응하고 질문하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살아온 그런 사람이랄까... 무수한 삶의 레퍼토리들을 반복해서 들으며 내가 처음 겪어보는 어른으로서의 어머님을 알게 되었다.
이제는 ‘탕수육 사건’이 되풀이 될 때 의심을 거두고, 아무런 확인 없이 열 그릇을 시킨 어머님과 친구들의 이야기에 그럴 수도 있었겠다고 어렴풋이 생각한다. 탕수육 사건에서 또 어머님의 이야기는 결국 다른 이야기로 흐르고 흘렀다가 그렇게 사람을 의심하는 법 없이 착한 마음으로 시어른들에게 최선을 다하고 자식을 효심 가득한 아이들로 잘 키워낸 자신의 삶에 대한 예찬으로 마무리된다.
나는 그런 어머님의 방식대로 살 생각은 추호도 없고, 이미 그렇게 살 수 있는 사람도 아니지만 어머님의 성정과 일생, 의미를 두고 일궈 오신 것들에 대해 나의 기준만으로 마음대로 평가하는 일은 그만 두기로 마음먹고 더디게 나마 연습 중이다. 그 시작으로 이미 수십 번 넘게 반복된 레퍼토리를 다시 꺼내실 때면 딴청 대신 귀를 기울여 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