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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이름은빨강 Nov 03. 2021

이루지 못한 버킷리스트가 강박이 될 때

육아휴직을 하고 찾아온 공황 증세, 조급할 때 떠올리는 첫 마음

올해 아이 초등학교 입학과 함께 시작한 육아휴직이 4개월 보름 남짓 남았다. 계절이 세 번 바뀌면서 남은 날보다 보낸 날이 어느새 더 많아졌다. 휴직 전 다이어리에 써두었던 버킷리스트를 들춰보니 여러 소망과 계획들이 가득 적혀있다. 하루를 꽉 차게 바삐 보낸 것 같은데 시도조차 못한 일은 왜 이리 많은 건지... 시간은 왜 이렇게 빨리 흐르는 건지... ‘재미있고 즐거운 날들은 조금 슬프게 지나간다.’는 에쿠니 가오리의 <호텔 선인장>문구가 떠오른다.  

    

새벽마다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면서 창밖으로 계절마다 변화무쌍한 하늘을 감상하는 소소한 행복을 누렸다. 이제 계절이 한 번 더 바뀌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복직 날이 찾아올 것이다. 그날 이후 새벽의 하늘은 어떤 모습일까? 아직은 상상이 잘 되지 않는다. 즐거운 날들이 하루하루 줄어들수록 못한 일들에 아쉬움도 커져가지만 이젠 남은 시간을 어떻게 슬기롭게 마무리 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볼 때가 아닐까? 시작의 마음으로 돌아가 본다.     


휴직을 시작할 때의 마음     

아직 두 달 반 남짓 남은 올해는 내게 멋진 꿈같이 시작됐다. 출산했을 때나 남편의 해외근무 5년간 쓰지 못한 육아휴직을 실행에 옮겼기 때문이다. 출산 때는 회사 업무가 많아서, 남편이 해외파견을 떠날 때는 어린 아이의 의료문제에 경제적으로도 불안정해서 생각조차 못했다. 친정어머니를 비롯해, 가족의 많은 도움을 받았지만 ‘나’는 거의 없이 치열하게 하루하루를 살았던 시간이었다. 그런데도 엄마로서도 직장인으로서도 무엇보다 자신으로서도 늘 어중간했다. 

     

하고 싶은 일들을 언젠가의 내게로 미뤄가며 쫓기는 하루를 살던 나는 어느덧 40대의 가운데에 있었다. 그 사이 소망들은 빛이 바래고 사라져버렸다. ‘내일이 아니라 바로 지금을 위한 오늘을 살 수는 없을까?’ 질문이 거듭 가슴 속을 맴돌았다. 해야 할 일들을 위하여 하고 싶은 일을 한없이 유보하는 삶은 그만 살고 싶었다. 마침 아이에게도 엄마의 손길이 필요한 시기가 찾아왔고 용기를 내어 휴직을 신청했다. ‘하고 싶었던 것 맘껏 해봐야지.’ 부푼 꿈을 가득 안고서.  

   

휴직을 앞두고 만든 버킷리스트는 오랫동안 가슴에 담았던 소망으로 넘쳐났다. 피아노 배우기, 20대 때 배낭여행을 다녀온 곳으로 아이와 단둘이 여행가기, 제주 한 달 살기, 원 없이 책 읽기, 운동으로 체력 기르기, 소설 수업 듣고 단편 소설 쓰기, 사람 만나기 등 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았다. 잘 해 보려고 다이어리 작성법까지 들어가며 1년 계획을 짰고 먼저 휴직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눈 여겨 보았다. 한 번 뿐인 휴직 기간을 후회 없이 알차게 보내고 싶었다.     

  

마음과 달랐던 현실의 벽     

회사를 벗어나 자유인이 되면 뭐든 할 수 있을 줄 알았건만 현실은 많이 달랐다. 생활은 생각보다 비중이 크고 무거웠다. 업무 대신 서툰 집안일과 육아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아이를 챙기고, 청소와 요리 등을 끝내고 나면 자유시간이 없는 날도 많았다. 출퇴근 지하철에서 독서를 했는데 일부러 짬을 내지 않으면 책 한 장 읽기 어려웠다. 금세 돌아오는 하교시간에 맞춰 약속을 잡기도 쉽지 않았다. 시간이며 목표관리가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상에 서서히 스트레스가 쌓여갔다.       

더 이상 2-30대의 체력도 사라진지 오래였다. 하루를 계획대로 척척 살아낼 수 있을 것 같은 마음과 달리 일상에 온몸으로 부딪히다 보면 쉽게 지쳤다. 기다렸다는 듯 아픈 곳들이 아우성을 쳤다.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벌써 시간이 이만큼이나 흘렀는데...’ 다이어리 가득 써 놓은 계획들은 휴직을 시작한 지점에서 전혀 또는 몇 발짝 나가지 못했고 답답함은 커졌다.       


흘러가는 시간에 조바심을 내며 스스로 다그치다보니 경미한 공황증세가 찾아왔다. 어느 날, 가슴이 답답하면서 숨을 쉬기 어려웠다. 잠시 일어나 창문을 열고 물을 마시거나 스트레칭을 해도 마찬가지였다. 증세는 한동안 계속되었다. 휴직하고서도 계속 하고 있던 새벽기상과 글쓰기를 잠시 쉬고 할 일들도 하나씩 내려놓아 보았다. 마음과 달리 큰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휴직을 하면 자유롭게 살 거라고 생각했는데 휴직 생활도 회사 생활처럼 허덕이며 마치 시한부처럼 보내고 있었다. 마치 복직이 삶의 종말이기라도 하듯 소망조차 그 안에 이루어내야 할 과업처럼 여기고 몸에 꽉 힘을 준 채 마주하고 있는 내 모습이 보였다. 이대론 안 될 것 같았다. 생활이라는 채를 통해 꼭 남길 것들만 솎아내며 나는 버킷리스트가 적힌 다이어리를 덮어버렸다. 공황증세는 서서히 사라졌다.      


생활의 채로 걸러진 것    

 

Elzabathe Wales@Unsplash

서서히 마음을 비워내며 할 수 있는 것만 추려냈다. 휴직의 이유이자 가장 중요한 일인 엄마 노릇에 진심인 나날을 보낸다. 아이와 제주 한 달 살기나 먼 곳으로 단둘이 여행은 코로나와 학교 수업 등 상황을 고려하다 언젠가의 우리에게 잠시 미뤄두고 주말을 이용해 짧은 여행을 다니는 걸로 바꿨다. 휴직이라는 한정된 시간에 목표를 달성해야만 할 것 같은 내 마음 속의 조바심을 내려놓고 매일의 작은 점들을 부지런히 찍어가고 있다. 유년기가 끝나기 전 아이에게 못해 주었던 것들을 이제야 직접 하는 행복을 누린다.  

    

아이가 원하는 데로 손을 잡고 함께 집을 나서 학교에 가고, 뛰노는 모습을 보며 간식을 들고 놀이터 벤치에 앉아 책을 읽거나 노트북을 꺼내 내 일을 한다. 아이가 학교에 적응하고, 친구들을 사귀고, 그 친구들이 어떤 얼굴에 표정을 짓는지, 말투는 어떻고 성격은 어떤지 함께 알아간다. 더불어 아이의 친구들로 인한 따스하고 좋은 동네 인연들도 만들어 간다. 늘 관념적으로 우리 사이 대화 속에서만 존재했던 아이의 사생활에 지금 함께인 순간을 살아가고 있다. 이 시간은 분명 앞으로 우리 둘의 관계에 적지 않은 힘이 되어주지 않을까?     


늘 바삐 움직이면서도 다음 할 일들을 미리 떠올리며 시간을 쪼개는 분주한 삶, 미래의 언젠가로 소망을 유보하던 오랜 습관은 소망을 반드시 이뤄내야 하는 목표처럼 여기게 만들었고 지금-여기를 보지 못하게 했다. 공황증세를 겪고 나의 불안과 걱정을 비로소 직시했다. 휴직기간에 삶이 끝날 것처럼 굴던 조바심을 조금씩 버렸다. 하지만 모처럼의 자유 시간인데 결코 대충 보낼 수 없다는 강박관념은 여전히 남아있다. ‘더 멋진 추억을 많이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지나고 혹시 후회하지 않을까?’ ‘뭔가 결과가 있어야지.’ 돌아갈 날을 남겨두고 마음이 급히 달리기도 한다. 


다시 원점첫 마음으로 돌아간다.     

평온하다가도 요동이 칠 때면 최초의 그 마음으로 돌아가 본다. 하고 싶은 일에 솔직해지기로, 자유로워지기로 결심했던 그때, 소망을 나열하며 꿈꾸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고 기뻤던 그 마음을 다시 떠올린다. 계획대로 되진 않았지만 아예 못한 것도 아니었다. 시도조차 못한 일도 많지만 생활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귀하게 얻은 ‘삶의 휴가’를 잘 보내려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채워왔다. 문제는 버킷리스트를 해내지 못한 자신을 바라보는 내 마음일 뿐.  

   

덮어둔 다이어리를 펼쳐 휴직을 시작하던 때의 소망들을 다시 훑어본다. 생활의 채로 걸러낸 지금 이 순간도 돌아본다. 모처럼의 휴직 기간 동안 SNS에 올릴 만한 멋들어진 추억 쌓기도 당초의 목표달성도 많이 해내지 못했지만 나는 점점 마음이 편안해졌고 아이와 함께 한 순간에 집중할 수 있었다. 자꾸 내달리고 채찍질하는 마음 때문에 가끔 불안하고 제풀에 지쳐 쓰러졌다가도 끝내는 진짜 내 삶에 집중하며 중심을 잡을 수 있었다. 그럭저럭 잘 해왔다. 


여전히 내겐 버킷리스트가 있고 올해는 아직 80일, 휴직은 4달 반이나 남아있다. 아직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다. 남편과 아이와 함께 의논해서 그 중 한두 가지를 골라 나머지 시간을 채워보려 한다. 미션 수행하는 것 같은 부담은 내려놓고 즐겁게 남은 시간을 보내고 싶다. 올해가 끝나고 휴직이 끝나도 삶은 계속된다. 다 하지 못한 일은 내년, 복직 후 새롭게 또 시도해 보면 되지 않을까? 처음 버킷리스트를 써내려 갈 때처럼 가슴이 두근댄다.  

   

놀이터 벤치에 앉아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는데 친구들과 열심히 술래잡기를 하느라 땀범벅이 된 아이가 내게로 다가와 물을 찾는다. 물통을 건네니 세상 달콤한 표정을 지으며 물을 들이켜고 다시 친구들에게 달려간다. 아이의 얼굴을 보니 지난 여덟 달 잘 해 왔다는 확신이 든다. 어딘가, 다른 무엇이 아닌 지금-여기에서 온전하게 휴직의 남은 날들을 가벼운 마음으로 다시 꿈꾸고 하루하루 새롭게 써나가고 싶다.   


오랜 글벗들과 함께 40대의 고민, 생각을 이야기하는 낀 40대 연재 기사의 원문입니다.

http://omn.kr/1vk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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