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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이름은빨강 Apr 24. 2020

어느 새벽 시작된 쓰는 삶

숨이 멎을 것 같은 순간, 삶의 심폐소생술이 된 글쓰기

언제부터였을까? 숨이 콱콱 막혔다. 고구마 백개 삼킨 듯한 기분이 종일 이어졌다. 사무실에서 울화가 치밀고 감정이 널뛰었다. 타인의 선의를 이용해 잇속과 편의를 챙기는 사람들, 가혹한 부서장의 평가에 일희일비했다. 하루 내내 지쳤던 마음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가면 어린 아들이 목을 빼고 기다리고 있었다. 감정을 꾹꾹 누른 채 남은 힘을 쥐어짜 쏟아부었다. 매일 밤 지쳐 아이보다 먼저 잠이 들고 다음 날 같은 일을 반복하는 일상을 보냈다.    


해외에 나가 있는 남편은 영상통화로 응원을 해주었지만 어디까지나 방관자일 수밖에 없었다. 주말이 되어 시댁에 가면 어머님은 '홀로 타지에서 고생'하는 남편만 안쓰러워했다. 습관적으로 자신이 키운 시조카와 아이를 비교했고 남편과 손위 시누의 인성과 평판을 거듭 강조했다. 와인색 가죽 소파에 앉아 그 말들을 듣다가 입을 다문 채 아랫잇몸을 깨무는 습관이 생겼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오면 피곤한데도 잠이 들지 않아 캔맥주를 따곤 했다. 오랜 지기인 대학 후배에게 시어머니 험담을 한 바가지 늘어놓았다. 시원하기는커녕 가슴이 서늘해지는 단절감이 자꾸 차올랐다. 친정엄마에게도 털어놓아 봤다. "아이 듣는다. 그런 마음으로는 해결되는 것이 없다." 바른 소리가 더 숨 막혀 되로 주고 말로 받았다 후회했다.    


1년에 몇 번 연휴를 맞아 한국으로 들어오는 착한 아들인 남편은 밀린 어머님의 애정 공세에 화답하기 바빴다. 어느 해 추석을 앞두고 명절과 이틀 간격으로 붙어 있는 시아버님 제사 음식을 하면서, 연휴 전날까지 일하는 시누가 자신의 시댁에 가져가야 할 차례의 튀김을 만들어 달라는 부탁을 받게 되었다. 며느리에게 미안한 기색보다 다른 조상의 차례 음식을 해서 부정 탈까 걱정하는 시어머니의 말씀에 종일 속이 뜨거웠다. 아직 더위가 가시지 않은 날씨에 불 앞에 앉아 있어서 그렇다고 스스로 다독였다.

    

명절 전날 혼자서 종일 부엌에서 움직였다. 기름내에 전 몸이 쑤셨다. 시누 가족이 도착해 함께 저녁을 먹었다. 상을 치운 뒤 시누가 시댁 부엌에서 다음날 가져갈 동태전을 부치기 시작했다. ‘종일 일하고 와서 피곤할 텐데 가서 좀 도와주라’고 어머님과 남편이 이구동성으로 입을 모았다. 겨우 눌러두었던 불기둥이 가슴 한복판에서 치솟았다. 애꿎은 잇몸만 거듭 깨물면서 안 들리는 척 앉아 있었다. 남편과 어머님은 번갈아 시누 곁을 오갔다.     

결혼하고 단 한 번도 명절 때 내가 일하던 곁에 온 적 없던 남편이다. "그 튀김을 왜 내가 해야 했느냐(아들인 당신도 도와야 하는 게 아니냐 묻고 싶었다)"라고 한마디를 꺼냈다가 "누나가 너한테 얼마나 잘해주는데 너는 그것밖에 못하냐, 못됐다."라는 소리를 듣고서 무너져 내렸다. 미친 것처럼 소리를 지르는 나를 두고 그는 나가버렸다. 뒤로도 그는 대화를 피했고 연휴는 끝이 나 다시 해외로 돌아갔다.  

   

모든 것을 그만두고 싶었다. 아무 잘못 없는 아이가 눈에 밟혀 그러지 못했다. 후배 추천으로 평소에는 믿지도 않는 철학관에도 가 봤다. 잠시 위로받았지만 그뿐이었다. 지치고 상처투성이의 마음을 견디기가 힘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새벽에 일어나 두서없는 감정을 풀어 보았다. 나를 힘겹게 하는 모든 이들과 관련된 일들, 감정들을 고요한 새벽에 어두움을 조그맣고 네모나게 밝히는 하얀 창에 하염없이 써 내려갔다.   

  

말하고 싶어도 부끄러워서, 누구에게도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섣불리 꺼내지도 못했던 바닥의 감정들이 쏟아졌다. 처음에는 자신조차 기만했다. 이성적이고 분석적인 자아가 그것을 부끄러워했고 부정했다. 차츰 날 것인 있는 그대로의 감정들이 흘러넘쳤다. 그것은 '여자'로서 살아온 일평생의 모든 기쁨과 슬픔, 행복과 불행을 그대로 마주한 시작이었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속 시원하게 털어놓을 수 없어 바람 부는 대나무 숲에 대고 소리를 친 이발사처럼 매일 새벽 5시, 출근 준비 1시간 전에 피곤한 몸을 일으켰다. 노트북 전원을 켜면 그곳에 나만의 대나무 숲이 펼쳐져 있었다. 꽁꽁 숨겨둔 비밀을 써 내려갔다. 조금이나마 자신에게 솔직해질 수 있는 마법이 시작되었다.

    

다시 읽어보면 감정 과잉이 부끄러워 얼굴이 화끈거리기도 했지만 나를 위한 글이었기에 쓰고 나면 다른 것이 보였다. 부정적인 것들이 조금씩 사그러지자 다른 것들이 스며들어 일상을 채우기 시작했다. 여전히 사무실 동료들, 시어머니와 남편은 그대로였지만 달라졌다. 스스로가 자신의 감정에 민감해졌고 때로는 표현도 할 수 있는 용기가 조금씩 샘솟았다.   

 

오랫동안 누르고 숨겨온 나를 무너뜨리며 삶은 조금씩 달라졌다. 좋은 엄마, 아내, 며느리 같은 기능으로만 작동하는 사이보그 같은 모습 대신 감정을 고스란히 느끼는 갓 태어난 생명으로 나를 다시 발견한다. 큰일 나는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 자유롭고 편안한 내가 되어간다. 더디지만 그런 자신이 반갑다.


그렇게 글쓰기는 숨이 멎을 뻔한 순간, 삶의 심폐소생술로서 시작되었다. '상처가 진주가 되는 나날'을 몸으로 살아내며 무너지던 나를 세우고 치유한다. 여전히 힘들지만 버티는 대신 있는 그대로 존재할 힘도 점점 커진다. 그 과정을 꺼내어 나누고 싶다. 그렇게 동시대를 살아가는 수많은 상처 입은 여자들에게 작은 위로의 한마디를 시작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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