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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 법칙과 우생학 1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룰루 밀러 지음, 곰출판

5월에 신간도서를 수서 하면서 알라딘 베스트셀러 칸을 클릭했는데,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책이 1위였다. 신비로워 보이는 보랏빛 심연 속으로 홀린 듯 헤엄쳐 내려가는 인어와 물고기들이 그려진 표지도 인상적이었지만,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제목도 철학책인 듯, 강렬했다. 그리고 도서관 서가에 꽂힌 뒤로도 쉬지 않고 대출되는 이 책에 대한 궁금증은 높아만 갔지만, 선뜻 펼쳐 볼 시간은 없었다. 어떤 내용이 담겨 있길래, 이렇게 많은 사람이 읽으려고 줄을 서는 것일까. '나도 꼭 읽어봐야지.' 생각만 하고 있다가, 드디어 꼭 읽어야 하는 일이 생겼다. 7월 독서 모임 토론 도서로 선정되었기 때문이다. 7월 초, 도서관에 작은 공사가 진행되어 3일 동안 휴관했는데, 공사가 잘 진행되는지 점검도 할 겸, 도서관 내 동아리실 한 구석에서 이 책 읽기를 시작했다. 스프링클러 작업으로 도서관내 모든 곳에 커다란 비닐이 쳐지고, 천장 작업을 위한 소음이 요란한 가운데, 책을 펼치자마자 '혼돈'이란 단어가 나를 맞았다.

1906년 어느 봄날 아침, 갑작스러운 지진으로 수십 년에 걸쳐 모아 놓은 어류 표본 단지가 쏟아지고 깨지면서, 한 남자에 의해 명명받은 이름을  잃어버린 수많은 물고기가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혼돈의 공간에,  다시 차분하게 물고기들을 하나하나 들어 올려 바늘로 물고기와 이름을 붙여 꿰매는 남자, 어류 분류학자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있다.


데이비드는 8살 때부터 천문학에 심취해 하늘의 모든 별들을 익히고, 자신의 중간 이름에 'star'를 넣고 평생을 별처럼 빛나고자 했다. 주변에서 보기에는 현실과 격리된, 강박적인 수집가로만 비쳤던 데이비드가,  1873년  22세때 당시 가장 유명했던 박물학자 루이 아가시를 만나면서 '세상의 혼돈에 질서를 부여하는 자'로서의 소명을 깨닫고 일생을 살아가게 된다.

스승 아가시는, 수집의 중요성에 대해

"우리는 진실을 찾으러 온 것이라네. 불확실한 열쇠로 신비의 문을 하나하나 열려고 시도하지." 43p.

아가시는 분류학의 작업을 '창조주의 생각들을... 인간의 언어로 번역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7살 때 저자 룰루는 과학자인 아버지로부터, '넌 아무것도 아닌 존재, 거대한 우주라는 시간 속에서 곧 사라져 버릴 티끌 같은 존재'라는 말을 듣고부터 항상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미를 알고 싶었다. 룰루는 20대 초반에 우연히 세상의 혼돈에 도전해 위대한 업적을 이뤄낸 데이비드 스타 조던에 관해 알게 되고, 관련 도서들을 읽으면서 자신의 혼란스러운 삶에 마침표를 찍어 줄 수도 있는 안내자로서 받아들이게 된다.  

"아무 약속도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희망을 품는 비결, 가장 암울한 날에도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비결, 신앙 없이도 믿음을 갖는 비결 말이다." 66p.


데이비드는 스승 아가시의 '퇴화' 개념과 다윈의 진화론을 함께 버무린 어류 분류학에 전념하면서 점점 명성을 얻게 된다. 갓 마흔 살이 되었을 무렵, 데이비드는 1891년에 스탠퍼드 대학의 초대 학장으로 취임하게 된다. 데이비드의 인생에 여유와 풍요로움을 선사해 주던 스탠퍼드가 사망하게 되고, 그의 부인 제인 스탠퍼드와 학교 운영 관계로 갈등을 겪게 되면서 그의 삶에도 먹구름이 끼게 된다. 그런 미묘한 과정에서 제인 스탠퍼드는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는다. 독살과 자연사 사이에서.

룰루는 자신의 든든한 안내자 데이비드가 보여 주는 질서의 세계를 따라가다가, 수상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자신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 제인을 독살하고 은폐를 시도한 살인범, 데이비드의 명성에 가려 있는 위선과 오만을.

바우마이스터와 부시먼은 이렇게 썼다. "쉽게 말해서 가장 위험한 사람은 자신을 우월한 존재라고 보는 사람들이라기보다 자신을 우월한 존재로 보고 싶다는 욕망이 강한 사람들이다."151p.

1913년 데이비드는 어류를 수집하러 다니다가 우연히 알프스의 아오스타라는 마을을 가게 된다. 아오스타는 가톨릭 교회에서 운영하는 정신적, 육체적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다. 이곳에서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가족을 이루고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데이비드는 스승 아가시가 말한 '인류의 퇴화'를 떠올리면서 공포를 느끼게 된다. 그러면서 데이비드는 '백치들은 몰살해야, 인류의 종이 발전한다는' 우생학에 기반을 둔 책을 쓰게 되고, 열렬한 옹호자가 된다.

우생학은 1883년 찰스 다윈의 고종사촌인 영국 과학자, 프랜시스 골턴이 만든 단어로  '좋은'과 '출생'을 뜻하는 그리스어를 조합해 만들었는데, 이러한 우생학을 제일 먼저 미국으로 들여온 사람이 데이비드다.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데이비드의 권고로 미국 전역에서 정신적, 육체적으로 장애가 있는 사람들은 은밀하게 불임 수술을 받거나, 장애아들은 태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방치되면서 죽게 되는 일들도 일어난다.

이런 무자비한 우생학에 반대하는 학자들과 우생학에 몰입하는 사람들 간의 이견 핵심은 <종의 기원>에서 비롯되었다. 다윈은 어떠한 환경에서도 퇴화하지 않고 진보하는 종의 가장 큰 특징으로 유전자에 생긴 '변이'를 꼽았지만, 우생학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돌연변이와 특이한 존재들을 모두 제거함으로써 진화한다고 생각했다. 우생학에 대한 반대가 더욱 높아지자 데이비드와 지지자들은 '우생학기록보관소'를 만들고 자신들의 의견이 맞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자신들이 보기에 세상 '부적합자'들을 가둬놓고 노예처럼 다룬다.


저자 룰루는 데이비드의 행적에 따라 우생학이 들끓던 시절, 수용소에 갇혀 지체장애로 불임 수술을 받았던 여자들을 만나면서 우생학의 잔인함과 오만함을 재발견하면서 분노에 휩싸인다.

그러면서 '민들레 법칙'을 떠올리게 된다.

"어떤 사람에게는 민들레는 잡초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 똑같은 식물이 훨씬 다양한 것일 수 있다. 약초 채집가에게 민들레는 약재이고 간을 해독하고 피부를 깨끗이 하며 눈을 건강하게 하는 해법이다. 화가에게 민들레는 염료이며, 히피에게는 화관, 아이에게는 소원을 빌게 해주는 존재다. 나비에게는 생명을 유지하는 수단이며, 벌에게는 짝집기를 하는 침대이고, 개미에게는 광활한 후각의 아틀라스에서 한 지점이 된다." 227p.

평생을 명망 있는 어류 분류학자로서 편히 살다 간 데이비드에게 분노를 느끼면서, 정의란 존재하는가에 대한 물음을 가진다. 그런데 평생을 어류 분류학자로서 엄청난 업적을 이룬 데이비드의 일생이 '아무것도 아닌'것이 되는 일이 생긴다. 바로 1980년대에 분류학자들이 "어류란 존재하지 않는다."를 깨달은 것이다.

분기학이라는 이름은 '가지'를 뜻하는 그리스어 '클라도스'에서 왔으며, 그 가지들을 추적하는 사람들이 분기학자들인데, 이들은 모든 생물이 진화의 나무에서 어느 가지에 속하는지를 밝혀내는 사람들로서, 물고기처럼 생긴 생물들 중 다수가 포유류와 더 가까운 관계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진보로 나아가는 진정한 길은 확실성이 아니라 회의로, 수정 가능성이 열려 있는 회의로 닦인다는 것." 250p.


룰루는 처음에는 자신의 혼란한 삶에 질서를 부여해 줄 수 있는 안내자로 데이비드를 만났으나, 결국에는 자기기만에 빠져 많은 사람을 불행에 빠뜨린 오만한 우생학자로서의 데이비드를 발견하고, 글로써 세상에 폭로했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책은 어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상상도 못 해본 사실을 알게 해 준 책이다.

인류의 시작은 바다에서 시작되었다는 말도 생각나고, 어떤 물고기는 사람과 같은 포유류에 속한다는 것.

한 선생님은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란 영화가 생각난다고 하셨다. 그때는 물고기 모양을 한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의 사랑이 낯설었었는데, 이 책을 보니 이해가 된다고도 하셨다.

나는 이 책 뒷부분을 읽으면서, 요즘 영국과 북유럽에서는 문어와 바닷가재와 같은 갑각류에도 동물 복지가 적용될 수 있는 법안이 준비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났다. 민들레 법칙 등, 내가 요즘 관심 있는 동물권과도 연결할 수 있는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간간히 히틀러와 연관되어 알게 된 '우생학'이 어떻게 탄생하고, 어떤 시대를 살아내면서 많은 사람에게 위해를 가했는지를 역사적으로 알게 되어 좋았다.


자기 삶의 이정표를 찾아 떠난, 한 여자의 집요함이 위선으로 가득 찬 한 남자의 민낯을 밝혀내고, 그로 인해 최근까지도 스탠퍼드 대학교에 동상과 건물 이름으로 명성을 이어오고 있던 데이비드의 흔적을 없애버리는 것을 보면서, 이런 삶을 살아 낼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학 전문 기자인 룰루 밀러는 방송계의 퓰리처상으로 불리는 피버디상을 수상했고, 이 책으로 '2020년 최고의 책'이라는 많은 찬사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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