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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기인 Sep 03. 2020

2. 좀머 씨 '닮은' 이야기

숨고 싶은 마음

좀머 씨는 이른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늘 걸어 다니기만 한다. 마을 사람들은 좀머 씨의 이름이 하인리히 좀머인지 혹은 프란츠 크사버 좀머인지 알지 못했으며, 박사인지 교수인지 모르는 채, 사람들은 그를 유일하게 ‘좀머 씨’라는 이름만으로 알고 있었다. 좀머 씨의 이름이나 직업에 대해 제대로 아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지만, 남자든 여자든 아이든 심지어 개까지도 늘 걸어 다니기만 했던 좀머 씨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좀머 씨는 밀폐 공포증 환자야, 그래서 방안에 가만히 있지 못하고 계속 걷는 거야."라고 자기들끼리 생각하고 그 사람에 대한 정의를 각자 자신 있게 내릴 뿐이다. 그는 자식도 없었고, 친척도 없었으며, 그를 찾아오는 손님도 없었다. 대신 그에게는 길쭉하고 약간 구부러진 호두나무 가지의 지팡이와 배낭만이 있을 뿐이다. 좀머 씨의 어깨를 넘긴 지팡이는 그의 제3의 다리 역할을 해내는데, 그는 그것을 앞쪽으로 밀면서, 땅을 찍으며 온 힘을 다해 몸을 앞쪽으로 쭉 밀어내곤 했다.



하루는 돌풍이 불었다. 빗줄기는 차츰 우박으로 변했고, 우박은 처음에는 바늘귀만 해 보이다가 금방 콩알만 하게 커졌고 다음에는 돌멩이만 해지다가 마침내는 맨질맨질한 흰 공처럼 변했다. 우박 떨어지는 모습이 너무 뒤죽박죽이고 요란스러워서 화자가 어지럼증을 느낄 정도로 성난 날씨였다. 화자와 화자의 아버지는 차를 타고 가는 도중 호두나무 지팡이로 몸을 앞으로 밀어내면서 잰걸음으로 우박이 떨어진 길을 계속 걷는 좀머 씨를 발견했다. "차에 타세요! 태워다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좀머 씨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은 채 계속 걷기만 한다. "어서 타시라니까요, 글쎄! 몸이 흠뻑 젖으셨잖아요! 그러다가 죽겠어요!" 그 말에 좀머 씨가 우뚝 섰다. 그는 오른손에 쥐고 있던 호두나무 지팡이를 왼손으로 바꿔 쥐고는 화자의 아버지 쪽을 쳐다보고는 아주 고집스러우면서도 절망적인 몸짓으로 지팡이를 여러 번 땅에 내려치면서 크고 분명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

요즘의 나는 파트리크 쥐스킨트 소설 <좀머 씨 이야기> 속 좀머 씨가 된 기분이다. 돌풍이 부는 성난 날씨에도 ‘미련’나무 지팡이를(그 나무는 단단한 성질을 갖고 있다) 쥐고 아무 말 없이 걷는 나에게 사람들은 차를 타고 와 한마디씩 외친다. ‘워킹홀리데이도 못 가게 생겼는데 퇴사해서 어떡하니’ 회색 차에 탑승한 이모가 걱정스레 쳐다본다. ‘계획이 무너진 것뿐이지, 인생이 무너진 건 아니지 않니’ 걱정 때문에 미간이 찌푸려진 삼촌의 은색 빛이 도는 차가 지나간다. ‘남편이 너 만나면 가지 말라고 말리래’ 조수석에서 아기를 안고 창문으로 나를 걱정스레 보는 친구도 지나간다. ‘내 친구가 너 어떻게 됐냐고 물어보더라’ 안면이 없는 친구의 친구가 작은 승용차 뒷좌석에서 빼꼼 나를 쳐다본다. ‘너 못가고 한국에 있으면 계속 만날 수 있겠네? 너무 좋다’ 장난스레 웃는 친구를 태운 스포츠카가 지나간다. ‘팀장님도 그렇고, 회사 사람들이 어떻게 됐는지 참 궁금해해요’ 그나마 퇴사 후에도 연락을 계속 나누던 직장동료A 씨가 SUV 뒷좌석에 회사 사람들을 잔뜩 태운 채 지나간다. 차라리 저 사람들을 모두 태운 관광버스 1대가 와서 ‘그러다가 죽겠어요!’라고 외치면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 빽 소리를 한 번만 지르고 조용히 걸으면 그뿐이다. 하지만 <좀머 씨 '닮은' 이야기> 속 자동차들은 1대가 아닌 여러 대가 줄지어 대기하고 있다. 심지어 그들의 안부 인사가 너무 사려 깊은 도입부로 시작했기에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라고 빽 소리 지를 수 있는 분위기도 아니었다. 



퇴사도 했는데 앞으로 어떻게 할 거냐고 묻는 차 앞에서는 쭈뼛쭈뼛 ‘나도 몰라’라고 뒤늦게, 아주 느리게 대답한다. 그리고 좀머 씨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듯 나도 뒤이어 입술을 우물쭈물 움직이며 말을 이어간다. "비자 만료 기간이 얼마 안 남긴 했는데.. 상황이 나아질 거 같진 않고.. 확실한 일정들이 없어서.. 나도 몰라. 요즘은 그냥 생각 안 하고 쉬고 있어..(사실 엄청 생각하고, 너무 많은 걱정에 꿈에서까지 근심의 잔상들이 나타난다)" 그들의 안부 인사에 대답만 하는 것뿐인데, 나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을 구연할 때마다 내 대답이 비수가 되어 마음으로 돌아와 꽂힌다. 줄 서 있는 수 대의 차 앞에서 나는 우물쭈물 대답을 이어가야 했고, 그럴 때마다 현타는 반복되었다. 어느 날 친구의 엄마가 친구에게 내 근황을 물어봐서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지금 걔가 제일 싫어하는 게 안부 물어보는 거야."



소설 말미, 좀머 씨는 마을사람들이 모르는 곳으로 숨어버린다. 마을 사람들은 그의 비밀스러운 행각을 두고 여러 가지 추측을 한다. ‘완전히 돌아 버렸을 거야’, ‘길을 잃어버리고 다시 집으로 가는 길을 못 찾았던 것이 분명해. 아마 그 사람은 자기의 이름이 무엇이고 자기가 어디에 사는지조차 모르고 있을 거야’* 일단 나도 그처럼 숨어버렸다. 나의 월세 40만 원짜리 방으로 말이다. 사람들은 여전히 궁금해한다. 메신저의 프로필 사진은 비어있고, 꾸준히 활동하던 SNS도 멈춰버렸으니, 그들에게 나의 잠적은 좀머 씨 만큼이나 비밀스러운 행각으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나에 대한 소문은 좀머 씨 것만큼이나 무성하진 않았다. 

좀머 씨는 자기가 숨기로 한 장소에까지 지팡이를 앞으로 옮겨 찍으며 걸어갔다. 내 손에도 아직 미련나무 지팡이가 쥐어있다. 단단히는 붙잡고는 있지만, 얼마 전에 비행기표를 환불 요청하기 위해 항공사 사무실을 찾아가기도 했다. 퇴사는 했지만, 집 계약은 그대로 유지했다. 미련나무 지팡이를 쥐고 계속 걷는 나를 내가 붙잡아 세워두고, 현실과 타협하자며 울며 겨자 먹기로 나를 설득해 이끌어낸 눈물겨운 합의였다. 서로 타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음에 묵힌 것들이 몸의 통증으로 나타나 버렸다. 머리가 지끈거려 눈을 감고 목을 뒤로 젖힐 때마다, 눈동자와 눈꺼풀 표면 사이 검붉은 해수면에서, 해파리들이 초록빛 파장을 일으키며 이리저리 유영한다. 어지러운 시간들이 조용하지만 요란하게 지나가고 있었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좀머 씨 이야기> 일부 내용을 발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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