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업주부의 단상
아침 8시 20분.
아이의 조그만 손을 잡고 현관문을 나선다. 햇살은 따뜻하고, 아이는 해맑게 재잘거린다. 우리는 매일 아침 이렇게 함께 걷는다. 그럴 때면 회사를 그만두고 아이들을 키우는데 집중하기로 했던 그 결정이 너무나 옳았음에 뿌듯함이 느껴진다.
예쁘고 단정한 옷차림, 깔끔하게 만져진 머리, 오늘따라 내 손길에 더없이 예뻐 보이는 아이를 보면 발걸음은 행복하다. 교문에 들어선 아이를 향해 손을 흔든다. 아이는 조금 걷다 뒤돌아 손을 흔들고, 또 조금 걷다 뒤돌아 손을 흔든다. 넘어질까 걱정스러운 마음에 "앞을 보고 걸어야지~"라고 소리쳐 주지만, 길 끝까지 손을 흔들어 주는 아이의 마음에 오늘도 괜스레 뭉클해진다. 매일 아침 뭉클해지는 주책없는 엄마다. 어쩌면 유난스러운 엄마일 테지만, 또 그렇게 보이고 싶지는 않은 마음에 교문에서 저만치 떨어져 바라본다. 이제는 혼자 보내도 될 것 같지만, 내가 이러려고 그만뒀는데 싶어 조금은 더 등굣길을 함께 하기로 생각해 본다. 아이가 더 이상 보이지 않음을 확인하고 나면 뒤돌아 집으로 향한다.
아이를 꾸며주느라 나는 대충 트레이닝복에 야구모자를 푹 눌러쓰고 나왔다. 대부분의 엄마들이 나와 비슷한 차림새다. 간혹 아이를 등원시킬 때 입는다는 예쁜 등원룩을 입고 메이크업까지 끝낸 엄마들도 보인다. 겨우 양치만 하고 나온 나와 달리 참 부지런하다는 생각이 든다. 저 멀리서 단아한 정장 차림에 아이의 손을 잡고 등굣길을 지나는 엄마도 보인다.
'워킹맘이구나. ‘아.. 저 정장은 너무 내 스타일이다. 어느 브랜드지?'
'출근시간이 늦나 보네.. 아이를 데려다주고 출근할 수 있다니.. 어떤 회사일까..?'
궁금하다. 두 마리 토끼를 모두 다 붙잡은 것 같은 여유가 느껴져 부럽기까지 하다. 그러나 이런 감정보다 우선이었던 건 ‘나도 저렇게 차려입고 매일 아침 출근했었는데.. 나도 저 엄마랑 비슷한 모습이었는데..‘ 사뭇 다른 지금의 나와 대비되면서 가슴속 깊이 묻어둔 감정이 나온다.
'나도 내 자리가 있는 어딘가로 저렇게 바삐 출근하고 싶다.’
퇴사를 선택하고 나서는 ‘후회’라는 감정이 들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한 것 같다. 어렵게 결정한 만큼 한순간이라도 '다시 출근하고 싶다.'라는 감정이 들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에 오로지 아이들과의 행복한 시간만을 위해 애쓰고 노력했다. 그래서 많이 잊고 지냈는데, 전업주부 4년 차, 등원길 프로페셔널함이 물씬 풍기는 단아한 정장의 워킹맘을 대면한 순간 그 감정이 다시 꺼내어졌다.
출근할 때 입던 정장들은 거의 다 옷장 속에 그대로 있다. 옷장 정리를 하다 보면 그때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옷들이 한가득 있다. '클라이언트를 처음 대면할 때 자주 입던, 너무 꾸민 것 같거나 튀지 않으면서도 세련되고 신뢰감을 줄 것 같은 느낌의 옷', '중요한 PT자리가 있을 때면 입던, 좀 더 스마트하고 프로 같아 보이는 옷', '출근룩으로서의 드레스 코드를 해치지 않으면서도 편안해서, 야근이 예상될 때면 입던 옷', '격식을 갖춘 회식자리에서 나를 좀 더 돋보이게 해 주던 옷' 등은 마주칠 때마다 직장인으로 살았던 그때의 이벤트들을 떠올리게 해 준다. 그 추억이 짙게 묻어 있어 전업주부로써의 TPO에는 어울리지 않지만, 버리지는 못했다. 계속 직장생활을 했다면, 트렌드가 지난 옷들은 버리고 새로 계속 채워갔을 텐데 추억이 돼버리니 간직하게 되네… 무심하게도 가득 채워져 있는 H라인 치마들이 오늘따라 더 쓸모없게 느껴지네..
잠시 들뜬 마음에 구직사이트를 열어보지만, 철 지난 정장들처럼 내 이력서도 유행이 지난 것 같아 초라해지는 기분이다. 회사로 돌아갈 생각이 없으니 괜찮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구직사이트 창을 닫고 컴퓨터를 끈다. 돌봄 수업도, 학원도 가지 않는 우리 집 1학년은 내가 몇 가지 집안일을 끝내고 돌아서면 하교한다. 이렇게 추억에 젖어 있을 시간이 사실상 없다. 얼른 집 정리를 끝내고 어제 유튜브에서 본 레시피로 간식도 만들어야 하고, 밑반찬도 몇 가지 해 둘 계획이다. 미리미리 해둬야 아이가 집에 있는 시간에 함께 누워 도란도란 책이라도 읽어줄 수 있다. 그렇게 잠시 스쳐간 출근의 추억은 고이 접어 옷장 속에 같이 넣어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