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월 3일, 마음에 담아 마음을 담는 DDF 프로젝트 작심(作心)3일
전하영
부산에는 겨울 내도록 눈이 거의 내리지 않는다. 어릴 적 눈과 관련한 기억은 손에 꼽힐 정도로 드물다. 드문 기억 속에서 공통적으로 떠오르는 장면은 순수함의 결정체와 같은 새하얀 눈 위에 아폴로 11호의 닐 암스트롱이 인류 최초로 달에 발자국을 새겼던 것마냥 나의 발자국들이 뽀드득뽀드득 찍혀지는 장면들이다. 그때의 느낌은 신기함 그 자체였다. 50년을 살며 신기함은 신기루처럼 사라졌지만, 그때의 감성은 아직도 남아있는 듯 눈을 보면 어린 시절 나로 돌아가 뽀드득뽀드득 눈을 밟고 다닌다. 나의 흔적을 남겨야 한다는 본능적 행동인가?
인간은 누구나 가치로운 삶을 꿈꾸고 그 삶에 투영된 성과(흔적이든 족적이든)를 타인과 나누고자 혹은 타인에게 전하고자 한다. 본능적으로... 문자가 없던 시대에는 말과 말에 의해 전파되어 전설을 만들어내기도 하고, 그림으로 표현하여 유적을 만들기도 한다. 문자가 발명된 이후에는 보다 더 자세한 기억들이 역사로 기록되었다. 지구상에 살아있는 모든 생명 중 인간만이 유일하게 기억을 기록하고 저장하여 전달한다. 그러니 인간의 유일한 본능이라 해도 무방하다.
거대한 서사나 위대한 인물만이 큰 발자국을 남기는 것은 아니다. 평범한 한 사람의 일상의 경험도 누군가에게는 위대한 발자국이 되기도 한다. 인쇄매체와 전송장치의 비약적인 발전은 기록과 전파가 특정인들의 전유물에서 누구에게나 허용되는 일상의 삶에서 자연스러운 행위가 되게 했다. 그렇기에 발자국 하나 잘 찍어 유명인사가 되기도 하고 수많은 사람들의 귀감이 되기도 한다.
평생교육사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는 나는 어떤 발자국들을 남겼을까? 위대하지는 않더라도 누군가에게 길라잡이가 되었다면 나름 멋진 삶일 것이다. 나 또한 녹록지 않은 길을 담담히 걸어간 선배들의 발자국을 보며 걸어가고 있으니깐^^
권창숙
문을 열고 나간다.
새하얀 눈이 소복이 내려있다. 내 앞에 눈 위를 걸어간 발자국이 보인다. 성큼성큼 걸어간 듯한 그 발자국은 나의 발보다 큰 것 같다. 그리고 걸음 폭도 나보다 크다. 나는 그 발자국 위로 한 발을 내딛는다. 그리고 다음 발도 다음 발자국 위로 내딛는다. 왠지 그 발자국을 따라 걸어보고 싶다. 그 발자국에 포개어서 그 걸음만큼 발을 뻗어보고 싶다.
그렇게 몇 걸음을 가다가 멈춘다. 편하지 않다. 나의 걸음 폭과 같지 않으니 용만 쓰게 된다. 힘들다. 그리고 그 발자국에 내 발자국을 얹으려 하니 앞을 보는 게 아니라 그 발자국만 바라보게 된다. 아래만 보고 가니 주변의 좋은 풍경을 바라보지 못하고 그 풍경을 통해서 내가 느낄 수 있는 것들을 다 놓칠 뿐이다. 짧은 나의 다리가 잠시 원망스럽다.
이내 나는 내 걸음 폭으로 편하게 걷기로 한다. 내가 발을 내딛을 때마다 이전에 나 있던 발자국은 사라진다. 사라진다라기보다 내 발자국과 겹쳐져 누구의 발자국인지 알 수 없다. 나는 내가 가야 할 곳을 향해 나의 보폭으로 걸어간다. 고개를 들고 주변을 보기도 하고 잠시 멈춰 서기도 했으며 다른 것을 보느라 방향을 잠시 틀기도 한다. 그리고 다시 가야 할 곳을 향해 걸음을 걷기 시작한다. 방향은 같으나 아까와는 다른 곳에 나의 발자국이 남겨진다.
남겨진 발자국....
발자국이 선명하게 남도록 하기 위해서 힘껏 그리고 깊게 밟아야 한다.
선명하게 남도록 하기 위해서는 선명하게 찍힐 수 있는 곳에 가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 위에 만들어진 발자국은 눈이 녹거나 다시 눈이 내리면 사라진다. 모래사장 위의 나의 발자국도 파도가 지나가면 파도에 쓸려 사라진다.
현재의 순간에 최선을 다하고, 그 현재가 흘러 과거가 되면 흘려보낼 줄 알아야 한다.
내 발자국이 사라지는 것에 아쉬워 말자. 남지 않는 것에 불안해 말자. 또한 혹여라도 내 앞에 다른 이의 발자국이 이정표처럼 보이더라도 그 발자국이 내 것이 아님을 알자.
나는 내가 가고자 하는 곳을 향해 고개를 들고 나의 걸음으로 걸어가려 한다. 내딛는 한 발 한 발에 힘을 싣고서.
한성근
발자국은 걸어간 흔적이다. 누군가 걸어간 사람이 있었고, 발아래 남길만한 물질이 있었다는 것이다. 걷지 않았다면, 깨끗한 바닥이었다면 발자국은 남지 않는다. 발로만 흔적을 남기는 것은 아니다. 손자국도, 말과 글도, 몸짓도 남는다. 남기고 싶어서 남기는 것이 있고, 남기고 싶지 않지만 남는 것도 있다. 좋은 것은 남기고 싶은데 남아 있지 않고, 좋지 못한 것은 남기기 싫은데 남아있는 경우가 있다. 인생은 뜻대로 되지 않을 때가 많다. 왜일까 생각해 보니 처음 살아보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답을 얻게 되었다.
여름에 자주 듣게 되는 노래가 있다. “(생략) ~~ 누구나 세상을 살다 보면은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을 때가 있어 그럴 땐 나처럼 노랠 불러봐 맞춰 꿍따리 샤바라 빠빠빠빠 ~~ (중략)” 클론의 꿍따리 샤바라다. 들을 때마다 기분이 전환된다. 당연한 걸 당연하게 여기지 못하는 건 아닐까? 좀 더 여유롭게 삶을 바라보기로 한다.
자신의 발자국은 뒤돌아봐야 보인다. 앞만 보고 가는 사람에겐 자신의 발자국은 보이지 않는다. 먼저 간 사람들의 발자국만 보일 것이다. 발자국이라는 단어 때문에 그동안의 삶을 뒤돌아보았다. 내가 남긴 좋은 것들 평생학습마을, 평생학습동아리, 의미와 가치를 나눈 사람들이 기억의 자국으로 남아있다. 아픈 기억들도 있다. 모두 사람들과의 관계가 남는다. 그때 왜 그랬을까? 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싸이의 어땠을까가 생각남^^) 나의 정신적인 건강을 위해 여기까지만 기억을 펼치기로 한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걸어야 할 길들이 있다. 가고 싶은 길들이 있다. 최소한 지금까지의 잘못된 선택을 반복하진 말아야 한다. 바른걸음을 걷기 위해 바른 자세를 배워야 한다. 그러면 분명 좋은 발자국들이 남겨질 것이다. 그러기 위해 정해진 곳에서 정기적으로 뒤돌아보며 어떤 발자국인지 확인하는 것이 필요하다. 좋은 선택이라는 확인이 필요하다. 수정이 필요하면 과감하게 수정하고 더 좋은 것을 받아들이는 데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내 발자국은 뒤돌아봐야 알 수 있다.
최정연
어느 날, 토네이도에 휩쓸려 오즈의 나라에 불시착한 도로시에게 북쪽 마녀는 집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위대한 오즈의 마법사를 만나는 것이라고 알려준다. 도로시는 강아지 토토와 함께 오즈의 마법사가 사는 에메랄드 성으로 향한다. 똑똑해지고 싶은 허수아비와 심장을 가지고 싶은 양철 나무꾼, 용기가 필요한 사자를 만나 함께 그를 찾아 떠나는 긴 여정을 시작한다.
영화 오즈의 마법사(The Wizard of Oz)는 1939년 MGM에서 제작한 뮤지컬 영화다. 주제곡인 Over the Rainbow는 세월을 초월하는 명곡으로 지금도 사랑받고 있으며, 오즈에 떨어진 도로시가 문을 열고 나오는 순간 화면이 컬러로 바뀌는 극적인 연출 덕에 최초는 아니지만 컬러 영화 시대를 여는 상징적 작품으로도 유명하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내 기억 속 인상적인 장면은 착한 마녀가 선물해 준 빨간 구두를 신고 초록 나무들 사이로 끝없이 펼쳐진 노란 길을 따라 도로시가 친구들과 함께 걸어가는 모습이다. 각자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등장인물들은 위대한 오즈의 마법사를 만나야만 했고, 그를 만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노란 길을 따라 성까지 가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노란 길은 정말 꿈을 이루게 해주는 유일한 통로였을까? 기억을 더듬어 보면, 죽을 고생을 다 해 찾아간 오즈의 마법사는 사실 평범 그 자체의 아저씨였을 뿐이고 우연한 계기로 도로시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전개에 어이없어한 듯하다. 다소 황당하고 급히 마무리된 느낌을 주는 이 결말은 판타지 영화보다 현실에 더 가까울지도 모른다.
영화 속 노란 길은 현실에도 존재한다. 우리는 행복한 삶을 향해 누군가에게는 최상의 길이었을 인생 경로를 열심히 쫓아가지만 결국 그 길은 하나의 통로에 불과했음을 길 끝에서 깨닫곤 한다. 명문대를 졸업해 안정된 직장을 가지고 딸 아들 고루 낳아 화목한 가정을 이루는 결말도 좋지만, 그것만이 세상사는 유일한 길이라고 누가 단언할 수 있을까. 도로에 그어진 노란색 중앙선과 학교 앞 스쿨존을 보며 도로시가 걸어간 노란 길이 떠오른다. 마녀가 알려준 그 길을 벗어나면 도사리고 있을 위험이 그녀에게 공포였을 것이다. 중앙선과 스쿨존은 우리에게 이탈을 허용하지 않는 절대적 경계로 존재하지만, 적어도 한 사람이 살아가는 삶에 타인으로부터 강요받는 경계는 없었으면 한다. 결국 문제의 해결책은 에메랄드 성에 사는 마법사가 아니라 도로시의 시간 속에 있었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먼저 걸어간 발자국을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는 순진한 생각은 이제 그만해도 되지 않을까. 가끔은 성공과 안전이 보장된 노란 벽돌 길보다 각자에게 어울리는 길을 찾아 과감히 떠나도 좋을 것이다. 엘튼 존의 Goodbye yellow brick road가 생각나는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