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함을 의심하는 일

왜?

by mio

우리는 대부분의 것들을 별다른 의심 없이 받아들인다. 거리의 간판들, 화면을 채우는 광고, 익숙하게 반복되는 말투나 유행 같은 것들. 처음엔 낯설었던 것들도 반복되면 자연스러워지고, 어느 순간부터는 ‘원래 그런 것’처럼 느껴진다. 익숙함은 안정을 주지만, 동시에 사고를 멈추게 만든다.


가끔은 그런 흐름 속에서 불쾌한 낯섦이 스친다. 모두가 같은 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나만 어딘가 어긋나 있는 것 같은 감각. 말로 설명하긴 어렵지만, 확실히 무언가 이상하다는 느낌. 대부분은 그 감각을 눌러두고, 다시 익숙한 리듬에 몸을 맡긴다. 예민한 건 아닐까, 괜한 생각은 아닐까. 그렇게 낯섦은 금세 사라지고, 평온한 일상이 이어진다.



하지만 그 어긋남은 종종 진실을 비추는 틈이 된다.



사회는 오랜 시간 쌓인 기준과 관습 위에 놓여 있다. 무엇이 올바른 일인지, 어떤 목표를 향해야 하는지는 대체로 누군가가 먼저 정해둔 틀 안에서 결정된다.

우리는 그것을 반복해서 듣고 배우면서, 마치 자명한 진실처럼 받아들이게 되는데, 그러다 보면 그 기준 자체를 다시 생각해 보는 일은 점점 줄어든다.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순간, 질문은 멈추고 생각은 멀어진다.



문제는 이 당연함이 누군가에 의해 구성된 것이란 점이다. 이야기는 언제나 편집된다. 무엇을 넣고, 무엇을 뺄지를 결정한 사람의 의도가 그 안에 녹아 있다. 의도를 숨긴다기보다, 방향을 조정한다. 그렇게 사람들은 점점 질문을 멈추고, 답을 외우기 시작한다.


이럴 때 필요한 건 거창한 철학이나 거부가 아니다.

질문 하나면 충분하다.


“왜 이건 당연하다고 느껴지는가.”


이 질문은 익숙함에 미세한 균열을 만든다. 지금까지 무심히 받아들였던 구조에 다시 눈을 뜨게 한다. 왜 이런 형태로 굳어졌는지, 누가 그것을 이끌었는지, 나는 왜 그 안에 순응하고 있었는지를 되묻게 한다.



이 감각은 오래된 퇴마 의식을 떠올리게 한다.

퇴마는 단순히 귀신만 쫓는 행위가 아니다. 본래는 혼란과 불균형을 정화하는 과정이었다. 처음에는 겉으로 드러난 문제부터 제거한다. 욕망, 질투, 불안처럼 눈에 보이는 갈등의 조각들을 하나씩 걷어내고 나면, 그 아래에서 더 깊고 오래된 무언가가 드러난다. 세대를 거쳐 반복된 전제, 설명 없이 믿게 된 신념, ‘원래 그런 것’처럼 굳어진 기준. 퇴마란 결국 그런 익숙함의 뿌리를 되짚는 행위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지금 우리 사회에도 퇴마가 필요하다. 귀신 대신에 익숙함, 관성, 반복되는 기준들이 자리하고 있을 뿐이다. 너무 오랫동안 당연하게 여겨온 생각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모두가 따라야 한다고 믿는 규범들. ‘원래 그런 것’이라는 전제가 말없이 작동하는 그 자리에서, 우리는 더 이상 질문하지 않는다. 하지만 진짜 퇴마는 그 지점을 향한다.



우리는 지금 복잡한 사회 속에 살고 있지만, 정작 단순한 기준에 갇혀 있다. 성과, 효율, 경쟁 같은 말들이 모든 선택을 결정하고, 인간은 점점 더 수치와 분류로 요약된다. 하지만 사람은 숫자가 아니고, 삶은 그렇게 단순하게 설명될 수 없다.


그러니 어떤 순간에는 멈춰 서서 물을 필요가 있다.

“이 기준은 누가 만든 것인가.”

“나는 이걸 정말로 동의하고 있는가.”


이 질문들은 삶을 더 어렵게 만들지 모른다. 하지만 그 대신 삶의 방향을 내 쪽으로 조금씩 되돌린다. 익숙함은 편하지만, 질문은 자유로 향하는 첫걸음이다. 세상이 바뀌지 않아도, 그 세상을 바라보는 나의 눈이 바뀌는 것. 변화는 언제나 거기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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