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아내, 고양이, 그리고 묘화당(猫花堂)
2024년. 한국식 세는 나이로 어느덧 마흔이 되었다. 전과 다를 것은 없다. 어제와 비슷하게 지나가는 오늘, 알게 모르게 의미 없이 버려지는 시간들, 그 사이 어딘가에 무기력한 내가 자리하고 있었다. 버려지는 시간을 아쉬워하면서도 새로운 도전을 쉽게 결심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느새 내 나이는 애매한 곳에 도달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꿈과 희망으로 넘치던 십 대, 이십 대는 오래전에 지나갔다. 번아웃이 올 정도로 일만 하던 삼십 대는 삶에 생채기만 잔뜩 남기고 사라져 버렸다. 나에게 삼십 대는 잔인했다.
주변인들의 죽음이 연이어 찾아왔다. 나보다 겨우 두 살 많은 친척 형이 대장암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오랜 시간 치매로 고생하던 외할머니도 세상을 떠났다. 건강이 좋지 않던 막내 삼촌도 끝내 병마를 이겨내지 못했다. 아내를 많이 아꼈던 외할아버지가 혈액암으로 작별인사를 나눌 사이도 없이 돌아가셨다. 회사 근처에 공연 온 가수를 구경하려던 내 친구는 젊은 나이에 낙상사고로 세상을 등졌다.
나와 아내 곁에서 오랫동안 웃음을 주던 우리 집 고양이도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펫로스 증후군에 오랫동안 시달렸다. 내 마음의 어느 곳인가가 조금씩 깨어져 나가고 있었다.
회사생활에 지쳐있던 나에게 찾아온 연이은 죽음은 삶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가지게 만들었다. 먼 미래의 행복을 꿈꾸며 참고 참으며 쳇바퀴 같은 삶에 갇혀있는 것은 아닐까? 겨우 회사일 따위에 나를, 내 시간을, 내 삶을 갈아 넣을 가치가 있을까? 바쁘다는 시간에 쫓긴다는 이유로 회피해 왔던 질문들이 나를 두드리며 답을 요구하고 있었다.
정답은 명확하다. 사실 세상의 모두가 이미 정답을 알고 있다. 그럴 가치는 전혀 없다고 말이다. 세상 누구나 본인의 행복을 위해 사는 것이 좋다. 지금 무턱대고 참는다고 내일이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무모할 수는 있어도 내가 무너지는 것보다 낫다.
삼십 대 후반, 회사를 그만뒀다. 나의 젊음과 건강을 바친 대가로 채워진 통장 잔고가 나의 결정에 도움을 주었다. 이 과정에서 나의 결정을 전폭적으로 지지해 준 아내가 고마웠다. 번아웃으로 어쩌면 우울증으로 지치고 무기력해진 상태를 이겨내려 노력했다. 피트니스 클럽에서 운동도 하고, 가끔 여행도 다녔다.
시간이 흘러 어느덧 마흔이 되었다. 솔직히 마흔이 된 것은 나에게 큰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 삶을 다시 의미 있는 도전의 길로 돌릴 때가 되었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 해 가을, 결정을 내렸다. 결혼 이후 10년 간의 전세살이를 끝내고 아내와 나의 삶을 반영한 집을 짓기로 말이다.
단독주택을 짓기로 결정하면서 내 삶을 바꿀 또 다른 하나를 결심했다. 오랜 시간 동안 나의 꿈이었던 글쓰기를 시작하기로 했다. 책을 좋아하던 어린 시절의 내가 막연히 꿈꾸던 작가가 되어 보기로 말이다.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집 짓는 과정도 써보고 소설도 써보자. 그렇게 마음먹었다.
결정을 내렸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모든 것에 실패하고 다시 취직해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실패도 나중일이다. 일단은 아주 오랜만에 두근두근하는 나의 심장이 마음에 든다. 어쩌면 집짓기가 나에게 새로운 삶의 시작이 될지 누가 알겠는가?
묘화당(猫花堂). 새로운 삶이 시작될 집의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