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받아들이세요. 날씨처럼.

제주 3주 살기

by 아는언니

게스트하우스 <송당 별장>은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하면 하나둘씩 사람들이 거실로 모입니다. 어제는 2명의 여학생들, 사장님, 저 그리고 루피가 거실을 지켰다면, 오늘 밤에는 두 명의 남자분, 여자 2분, 여자 스텝 1분이 새로 들어오셨어요. 만두를 포장해오시니 센스 있는 분 덕에, 사장님이 소시지 야채볶음을 만들어주시고 저 또한 집에 오는 길 편의점에서 사 온 과자를 풀어 또 한 번 이야기꽃이 피었습니다.


모여앉아 오늘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별장의 밤

제주의 강풍을 맞본 사람들의 이야기


오늘의 첫 주제는 단연 '강풍'이었습니다. 제주도가 바람이 많이 분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여행을 시작하는 첫 날인만큼 저의 마음을 '그저 며칠 푹 쉬자. 여행 욕심 내지 말자.'는 것이었기에 걸어서 마을을 하나하나 둘러보았습니다. 그런데 고작 이 가게에서 다른 가게로 걷는 것도 '바람과의 싸움'이라 느낄 만큼 그 세기가 대단했습니다. 사장님은 태풍 온 줄 아셨다고 했습니다. 마당 위에 널어놓은 빨래가 날아가는 걸 넘어서 빨래 대가 날아가버렸다고 합니다.


전날 '한라산' 소주 1병을 비우고 오늘 강풍 속에 한라산 천왕봉을 등반한 여대생은 천왕봉에 올라서 바람이 너무 많이 불어서 진짜 날아갈 뻔했다고 고백했습니다. 또 스쿠터를 타고 도로 위를 달렸다는 청년은 눈물이 바람에 날리면서 달리다 보니 '이러다 죽겠다.' 싶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와... 뚜벅이 었던 나만 힘들었던 게 아니었구나...'


이번 여행 올 때, 캐리어에 책을 딱 두권 챙겼습니다. 그중 하나가 김지수 작가의 인터뷰집 <자기 인생의 철학자>에서 한 구절이 생각났습니다.


그냥 받아들이세요, 날씨처럼
<자기 인생의 철학자> _ 김지수 인터뷰집


책에서는 인생의 고난도 날씨처럼 그냥 무덤덤하게 받아들이고 그저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제주도에 살아가는 방법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이 날씨를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걸 첫째 날 배웠습니다. 그다음부터는 제주지방기상청을 통해 매일 날씨를 미리 체크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온 만큼 새로운 이야깃거리가 늘었습니다.


만두를 사 온 '만두남'은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데, 제주도에 공무원 시험을 보러 왔다고 했습니다. 뿔테 안경의 누가 봐도 모범생으로 보이는 그가 만두를 먹으며 이야기하는데, 자꾸 눈에 띄는 게 있었습니다. 바로 손목에 판다 모양의 문신이었습니다. 타투는 저 같은 보수적인 '유교 걸'에게는 아직도 심장을 뛰게 하는 아이템입니다. 혹시나 처음 보는 이의 심경을 거스를까 봐 선뜻 묻지 못했는데, 자연스럽게 그의 판다 문신으로 화제가 전환되었습니다.


보통 용문신을 하면 사람들에게 위협적인 분위기를 풍기기에 함부로 접근할 수 없는 공포심을 조장합니다. 그런데 그의 귀여운 판다 타투 옆에는 빨간 하트까지 그려져 있었습니다. 공무원 시험을 보았다고 해서 보수적인 사회에서 타투가 괜찮을지 물어보기도 했습니다. 그는 의미가 있는 그림들을 몸에 세기는 건 중독적이라 하며, 키워주신 할머니를 타투로 세긴 것도 보여주었습니다. 여하튼 누군가에게 세게 보이기 위한 문신이 아닌, 순둥순둥 세상 귀여운 판다를 문신한 이 청년은 엉뚱한 매력을 선사하며 분위기를 유쾌하게 해 주었습니다.


만두남의 판다 타투와 화룡점정 빨간 하트


스쿠터를 타고 강풍을 헤치며 달렸다는 친구는 광고회사에서 일한다고 했습니다. 딱 봐도 사람들과 쉽게 잘 어울리고 계속 주제를 던져 편안하게 이야기하게 해 주었습니다. 그는 발리에서 3주간 서핑만 했던 기억을 세상 천국이었다고 했으며, 익스트림 스포츠인 스카이다이빙-패러글라이딩-번지점프 세 개를 다 해본 혈기왕성 젊은이였습니다.


최근에 <나 혼자 산다>에서 장도연이 제주여행을 하면서 들른 곳이 다 핫한 관광지가 되었는데, 그중 휴게소에서 오징어 구이를 먹었던 곳에서 오징어도 사 왔습니다. 매스컴의 광고효과를 실감하면서 바람에 자연 건조한 오징어여서인지 서울에서 먹는 오징어와 비교할 수 없이 맛있었습니다. 편의점에서 제주도 맥주 3캔 사 와서 '맥주'에만 유난히 약한 저에게 한 모금씩 맛볼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광고남이 가져온 '장도연' 목화휴게소 오징어와 제주 페일 에일


이 산장은 산장지기가 있지만 스텝이 도와 함께 꾸려가는 곳이었습니다. 오늘은 여자 스텝 한분이 오셨고, 그녀는 유럽 교환학생을 다녀온 지 제 추측으로 한 2~3년 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어려서부터 물을 좋아하고 제주도에 살고 싶어서 이렇게 게스트하우스 스텝을 하며 제주 앓이의 꿈을 현실화시키고 있다고 했습니다. 유럽에서 교환학생을 했기에 기회가 되면 유럽에서 한인민박도 해보는 게 어떠냐는 이야기도 나왔습니다. 어쩌면 '젊은 날 저와 가장 비슷한 경험을 하지 않았을까?' 떠올려보게 하는 친구였습니다.


술자리가 끝나고도 아쉬움이 남아 영화를 틀어놓고 또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커피를 좋아하는 광고회사 친구와 커피이야기를 나누고, 제가 오늘 다녀온 카페를 공유해주었습니다.


저의 다음 여행지를 어디로 해야 할지는 늘 이 거실에서 정해집니다. 사장님의 추천 중 가장 마음에 들었던 곳은 아날로그 타자기로 글을 쓸 수 있는 <필기>입니다. 종달리, 대평리, 평대, 세화 등등 낯설지만 매력적인 지명을 가득 담아두고 남은 여행기간 중 꼭 들러보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새롭게 알게 된 '짐 옮김 서비스' 그리고, 제주 지역화폐로 할인을 받을 수 있는 '탐나는 전' 카드 신청, 그리고 다음에 묶게 될 게스트하우스 정보까지 가득가득 담아 아쉽게 대화를 마무리하고 방으로 돌아갑니다.


아, 이 여행 참 잘 왔다.


사실 제주에 오기 전에 저는 패배의식과 열등감으로 가득했습니다. '내 나이 곧 40인데 무얼 이루었나?' 한 거라고 이쁜 청춘을 회사에서 일하며 보낸 것뿐인데, 회사에서는 이유 없이 작아집니다. 실상 이룬 것도 많고, 능력도 많은데, 거짓 우월성에 빠져 세게 보이려는 회사 상사, 동료들의 말 한마디에 상처 받고, 실제로는 너무 소중한 나를 내가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날들로 괴로웠었습니다.

-아들러의 <미움받을 용기>에 따르면 거짓 우월성이란 열등감의 일부라 한다.-


90년대 생들인 이 친구들과의 대화가 저는 참 고마웠습니다. 회사 아저씨들이 젊은 여직원이랑 말 한마디 할 때면, 왜 그렇게 만발의 미소를 띠고 있나 싶지만, 사실은 저도 젊은 친구들과 이야기하고 어울리는 것이 좋습니다. 처음에는 제가 이곳에 잘못 온 게 아닌지 또 주눅이 들었었습니다. 20대나 오는 곳인 게스트하우스에 괜히 30대인 제가 와서 분위기 파악 못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제 곁에서 힘을 주는 사람들의 말을 떠올렸습니다. 제 마음속 멘토께 제주 여행을 왔다고 했을 때, 그는 "잘했다"며 "회사의 승진과 임금에 말리지 말고 자신을 찾으라."는 단 한마디로 저에게 힘을 주었습니다. 또 독서모임에서 만난 소중한 동생은 이야기했습니다. "언니, 걱정하지 말아요. 그곳에 가면 모든 게 잘될 거예요." 하며 용기를 주었습니다.


그 모든 저를 응원해주는 사람들이 떠오르고, 이렇게 어린 친구들과 대화할 수 있는 이 기회조차 감사하며 즐기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낮에 많이 돌아다니지도 않았지만 강풍을 뚫고 걸은 것이 따뜻한 이불속에 노곤노곤 녹아들어 푹 잠이 들었습니다.


알람 없이 저절로 아침 7시에 눈이 떠졌습니다. 아침 산책을 너무나 좋아하는 저는 창문을 열어 바람을 체크합니다. 아직 어제만큼이나 바람이 셉니다. '모든 걸 의지로 하지 말고 순리에 맡기자. 그냥 받아들이자, 이 날씨처럼.' 다시 한번 생각하고 조금 더 눈을 감고 이불에서 온기를 맘껏 누립니다.


함께먹는 송당별장의 아침식사

아침을 함께 먹는다는 것


9시는 <송당 별장>의 조식 시간입니다. 어제는 저 혼자 아침을 먹었는데, 오늘은 식탁에 네 명이나 모여 앉았습니다. 한동안 숟가락 젓가락 부딪히는 소리만 고요히 들렸습니다. 저는 낯선 사람들과 식사하면 극도로 들키기 싫은 증상이 있습니다. 바로 손떨림 현상입니다. 뭐 그리 불편하다고, 앞사람을 의식해서인지 손이 떨리는걸 누가 알아채는 게 극히 싫어서 밥맛이 없다며 밥을 먹지 않곤 했습니다.


오늘도 약간 그 증상이 나올 것 같았습니다. 마음을 편안하게 갖고 싶었습니다. 제 멘토라면 이런 상황이라면 어떻게 대화했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너무나 환하게 웃으면서 어린 친구들을 따뜻하게 대화로 이끌어줬을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이 시간을 아주 잘 즐기셨을 것만 같았습니다. 저는 멘토가 되어보기로 합니다.


먼저 어제 피곤해서 같이 저녁시간을 보내지 못하고 잠든 친구의 안부를 물었습니다. 그리고 판다 타투 친구와 또 한 번 타투 이야기를 하며 유쾌한 되새김 대화를 했습니다. 손떨림 없이 유쾌한 식사를 마쳤습니다.


각자 먹은 그릇을 직접 설거지하는 것은 이 별장의 규칙입니다. 설거지를 마치고 오늘의 힐링 장소인 '비밀의 숲'을 향해 걸음을 옮깁니다. 마을 초입의 개를 보고도 인사를 합니다. 루피 덕에 동물이 조금 덜 무서워졌습니다.


안녕 흰둥아,
안녕 오늘의 제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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