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해질 용기'있는 사람들이 모인 별장에서의 첫날밤

제주 3주 살기

by 아는언니
사장님, 저 버스를 탔는데 내려야 할 정거장에 버스가 안서요.
제가 탄 버스가 방향이 그 방향이 아니래요...


제주 도착. 버스로 숙소를 찾아가는 길


이방인에게 첫날 혼자 숙소를 찾아가는 길은 늘 쉽지 않습니다. 특히나 서울의 편리한 대중교통에만 익숙한 저, 낯선 곳에서 운전을 힘들어하는 저는 그 흔한 렌터카 서비스를 이용하지 않고 용감하게도 제주도 숙박을 묵기로 한 제주시 구좌읍 송당리를 찾아갑니다.


제주 공항에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배차 간격이 어찌나 긴지 서울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기다림의 연속입니다. 하지만, 여유를 찾으러 온 이곳에서 안달복달하지 않으리라 다짐한 만큼 느긋하게, 아주 느긋하게 기다려봅니다. 때마침 봄비가 오는 제주도에 캐리어를 끌고 버스를 타고 내리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는 저는 삼 주간의 휴가를 받은 여행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려야 할 정류장을 계속 체크하고 있었으나, 버스 안내는 '송당 상동'역을 부르지 않습니다. 계속 무슨 오름, 무슨 오름.... 오름 이름만 들리는데, 혹시나 하여 버스기사님께 여쭤봅니다.

"'송당 상동'역 지나갔나요?"

"아뇨 그 방향으로 가는 버스가 아니에요.?"

"네? 그럼 저 여기서 내려주세요."

"여기는 너무 인적이 드물어서 두정거장 더 가서 내려요. 거기가 나아요."


버스를 기다리며, 무서운 짐을 끌며, 이 나이가 되도록 운전도 잘 못하는 나 자신이 조금 또 미워지려 합니다. 하지만, 다행히 이 상황을 게스트하우스 사장님께 말하니, 친절하게 픽업을 오신다고 했습니다. 이 낯선 오름 한가운데서 전화해서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안도감을 줍니다. 아직 깜깜하지는 않지만 제법 어둑해지려는 오후 5시 넘은 비 오는 제주의 첫 도착 풍경. 사장님을 기다리며 '2 마트'라는 곳에서 과자 몇 봉지를 삽니다.


곧 사장님이 저를 데리러 오셨습니다. 사장님이라 하면 보통 생각하는 지긋한 중년이 아닌, 20대 후반 혹은 많아야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청년이 살가운 인사를 건네며 짐을 트렁크게 실어 줍니다. 차를 가지고 오지 않아서 저녁식사를 할 곳을 추천받고 싶었는데 밥을 먹고 혼자 산장 안으로 가는 길이 어둑해서 또 걱정입니다. 사장님은 "혹시 괜찮으시면..."이라고 조심스레 자신이 좋아하는 식당에서 테이크아웃을 해서 산장에서 같이 먹자고 제안을 주셨어요. 안 그래도 혼자 먹는 밥은 쓸쓸한데, 저는 흔쾌히 '예스'를 외칩니다.


그리하여 도착한 숙소에 짐을 풀고 서울에서 출발한 지 약 5시간 만에 저녁식사를 합니다. 언젠가부터 비행기 타는 것이 지긋지긋하게 두렵습니다. 심각한 터뷸런스를 경험한 이후, 비행기 타는 게 늘 긴장입니다. 게다가 제주 공항에 내려 숙소까지 온 험난한 여정이 시장을 배가시켜주었습니다. 첫 식사는 흑돼지 두루치기. 간이 센 음식을 전혀 좋아하지 않는데, 아주 입맛에 딱 맞아서 한 공기 뚝딱 해치웁니다.


송당별장에서 먹은 첫식사, 흑돼지 두루치기


게스트하우스 거실에 사람들이 모이다


숙소를 제주 구좌읍 송당리의 산속에 있는 곳으로 고른 이유는 서울의 복잡하고 사람 많은 부대낌에 질려버려서였습니다. 사람이 없고, 그저 자연만 있는 곳에서 조용하고 또 조용하게 아주 사람이 그리워질 때까지 고독하게만 있고 싶었습니다. 밥을 먹고 거실에 앉아있습니다. 거실에서 낯설게, 그렇지만 하나도 안 낯선 것처럼 앉아있는데, 조그마한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와, 공기네...
공기 같이 하실래요?"


저보다 조금 먼저 도착한, 아주 야리야리한 소녀의 목소리였습니다. 저한테 말한 게 맞는지 돌아보니, 아주 조그마한 소녀가 공기놀이를 발견하곤 저에게 말을 걸어주었던 것입니다. 저는 사람을 피해 이곳에 왔는데, 그 소녀의 제안은 그냥 저를 훅 빨아들였습니다. 그렇게 공기놀이를 하고 급 낯섦은 허물어졌습니다. 연이어 보드게임을 했습니다. 승부욕 따위는 없었습니다. 그저 이 곳에서의 시간을 욕심 없이 편안하게 보내고 싶을 뿐.

송당별장에 있던 공기놀이를 하며 처음보는 이들과 친해지기 시작


숙소에 있던 소녀 둘과 사장님, 저 이렇게 넷은 자연스럽게 거실에서 수다를 이어갔습니다. 저는 먹고 싶던 과자를 풀었고, 사장님은 이전에 묵었던 손님들이 놓고 갔다며 편의점표 돼지껍질과 한라산 소주 그리고 맥주를 은혜롭게 베풀어주셨어요.


송당별장에서의 하루 마무리


소녀 둘 중 한 명은 대학생이었습니다. 서울의 왕십리 근처 대한 소재의 인테리어 건축과를 다니고 있던 중 휴학했다고 했습니다. 어쩐지... 이 닳고 닳은 서울의 언니가 감히 이들과 어울려도 될까 싶을 정도로 세대의 큰 캡이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저는 뭐 여행지고 나름 동안을 자랑한다고 생각하면서 그냥 모른 척 어울렸습니다.


인디밴드를 좋아한다는 그들과 유튜브로 음악을 들었습니다. 제 평생 주변에 이런 노래를 듣는 이들이 없었는데, 신선한 음악의 가사들이 귀에 꽂혔습니다. 또 다른 소녀는 음악을 하고 내일 모래 음원 발매가 된다고 했습니다. 그녀가 직접 만들고 부른 노래를 들어봤는데, 사랑하는 동안 매일 울었고, 이별 후 아파서 죽음을 매일 생각했다는 가사가 가슴에 박혔습니다.


젊다는 것만으로 제 눈에는 너무나 이뻐 보이는 소녀가 마음속이 이렇게나 아프다는 걸 알고 나니 처음 보는 이에게 묘한 감정이 느껴졌습니다. 이 나이 꽤나 먹은 언니나, 젊은 청년이나 인생의 무게 앞에서 음악으로 힐링을 한다는 사실에서 동질감을 느꼈습니다. 제주도에서도 이렇게 한적한 산장을 찾는다는 건 그들이나 저나 인생이 그만큼 부대끼고 쉽지 않음을 느껴서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곳의 사장님은 전직 직업군인이었다고 했습니다. 그 일을 그만두고 사진작가 일을 하다가, 이 산장을 보고 주저 없이 산장 운영을 하기로 다짐했고 부모님의 반대가 있었지만 바로 실행에 옮겨 지금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자니 아들러의 <미움받을 용기> 중 '행복해질 용기'가 떠올랐습니다.


생활양식을 바꾸려고 할 때, 우리는 큰 '용기'가 있어야 하네. 변함으로써 생기는 '불안'을 선택할 것이냐, 변하지 않아서 따르는 '불만'을 선택할 것이냐. 분명 자네는 후자를 택할 테지. 아들러의 심리학은 용기의 심리학일세. 자네가 불행한 것은 과거의 환경 탓이 아니네. 그렇다고 능력이 부족해서도 아니고. 자네에게는 그저 '용기'가 부족한 것뿐이야. 말하자면 '행복해질 용기'가 부족한 거지.
아들러의 <미움받을 용기>


그 와중에 제 무릎 위로 이 산장의 마스코트 루피가 성큼 올라왔습니다. 저는 원래 강아지를 만지지 못합니다. 무서워서요. 근데 루피가 제 무릎에 자리를 잡더니 내려갈 생각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제 손가락을 할짝할짝 핥는데 손을 뺄 수가 없었습니다. 그냥 그대로 무장해제가 되었습니다. 그리곤 계속 강아지를 쓰담 쓰담해주는데 이 작디작은 온기를 갖은 생명체가 이렇게 사람을 힐링해주는지 세상 태어나 처음으로 느꼈습니다.


그동안 애완견을 잃고 슬픔에 빠져있거나, 아파서 수술도 시키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위로하면서도 그 심정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었습니다. 그런데 그 감정을 알 것 같았습니다. 짧은 시간 동안 너무나 힐링을 받았어요. 언제부터 저를 봤다고 자기 자신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이 작고 사랑스러운 소중한 강아지라니...


송당별장 마스코트 루피


강아지 곁에 좀 더 있고 싶어서 영화를 좀 보기로 합니다. 역시나 거실에서 대형 스크린으로 '인터스텔라'를 봅니다. 그냥 '하고 싶은걸 아무 걱정 없이 다 해보기'로 한 이 여행의 목적처럼 아무 복잡한 생각 않고 첫날밤을 보냅니다.


방으로 들어와서 잠을 청하려고 보니, 소박하고도 참으로 따뜻한 보금자리입니다. 럭셔리 호텔을 피하고 싶었습니다. 그저 좋은 향기가 나고, 깨끗하다면... 아침에 눈떴을 때 자연이 보이는 그런 곳이라면 되었습니다. 아주 뜨끗한 바닥 매트리스 위에서 뒤척임 없이 잠에 듭니다. 아주 편안하게.


송당별장 2인실 내부


제주의 첫 아침 그리고 산책


긴 늦잠을 자고 싶었는데, 7시에 눈이 떠져버립니다. 속상해... 이놈의 습관... 8시까지 자리에서 뒤척이며 좀 더 잠을 청하고는 더 이상 잠이 오지 않음을 알고 산책을 나갑니다. 어제 비가 와서 그런지 바람이 꽤 쌀쌀합니다. 제주도에 많다는 바람, 여자, 돌을 눈에 담아봅니다.


산길을 잠시 걷다 사람이 이렇게나 없는 게 무서워져서, 마을 어귀를 걸어봅니다. 돌담 벼락 너머로 귤이라기에는 크고 한라봉 같지는 않은 커다란 주황색 열매가 보입니다. '와 하나 따먹고 싶다...'라는 생각이 드는데, 나무 아래를 보니 누구도 이 열매를 따지 않아 바닥에 한가득 열매가 떨어져 있습니다. '와 부럽다...'싶은데, 닭과 큰 개가 나무를 지키고 있네요. '역시 동물은 무서워...'

저는 이곳이 아주 마음에 듭니다.


제주의 아침을 시작하러 발걸음을 옮깁니다. 욕심 없이. 행복해질 용기를 가득 충전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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