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3주 살기
오늘 오전 목적지는 '비밀의 숲'. 오름을 오르고 싶은데 바람이 너무 많이 불어 비추한다는 송당 별장지기의 안목을 200% 신뢰하기에, 대신 좀 바람의 영향을 덜 받는 <비밀의 숲>이란 곳으로 향합니다. 지도를 켜보니 걸어서 30분. 이 정도야 서울에서 매일 답답해서 걸었던 저로서는 일도 아니라는 생각을 합니다.
걷다보면 눈물이 난다
하지만, 아무래도 걷다 보면 여자 혼자 뚜벅이 제주여행은 쉽지 않음을 매 순간 생각합니다. 때마침 모퉁이를 도니 펼쳐지는 목초지 위의 매끈한 말들이 풀을 뜯고 있습니다. '이거지! 내가 좋아하는 말! 내가 이런 걸 보러 왔지~'하는 생각과 함께 뚜벅이 여행의 묘미를 느낍니다.
걸음걸음 자연 그대로를 만끽할 때, 너무 행복해서일까 자꾸만 눈물이 납니다. 행복해서일 수도 있고, '내가 무얼 바라여 서울에서 그렇게 치열하게 살았나...'불쌍해서 눈물이 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튼 걷다 보면 만나는 땅, 흙, 바람, 꽃, 향기, 공기가 제 마음을 여우만 져 주고 달래주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리하여 도착한 <비밀의 숲>에서 깨달은 바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가는 관광지를 갈 필요가 절대로 없다는 것! 이 정도의 피톤치트라면 저는 사려니 숲길이 훨씬 좋거든요.
물론 인스타 갬성으로 사진 찍을 수 있게 잘 꾸며놓긴 해서 관광객들은 많았습니다. 친구랑 왔다면 저도 인증샷 하나 건져보겠다고 무수히 많이 셔터를 눌렀겠지만, 혼 여행을 하는 저는 사진보다 눈으로 많이 담았습니다. 그 와중에 지쳐있는 도시살이의 친구들에게 전해줄 용도의 사진만 몇 개 남겨봅니다.
비밀의 숲과 맛점과 낮술의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숙소를 옮길 시간입니다. 2박 3일을 묶으며 힐링을 제대로 맛본 이 송당 별장에서 떠날 시간에는 한낮의 4시라 아무도 없이 루피만이 저를 배웅해줍니다. 정말 신기한 것이 제주도는 문을 잠그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곳이 외딴 시골의 별장이라 그런 건지 정말 궁급해집니다.
송당리 안녕~ 월정리 안녕!
송당리에서 이동한 숙소는 월정리 해변가입니다. 도착하자마자 햇볕이 탁 트인 것이 숲에서 나와 바다에 머무는 묘미라 하기에는 바람이 너무나 세서 해변을 걸으며 운치를 느끼기에 피로감이 몰려옵니다. 오늘 하루 묶을 '월정 여관'은 그야말로 레트로 감성의 시골집 분위기였습니다. 여자 사장님이 너무 따듯하고, 무엇보다 아침식사가 끝내줬습니다. 사실 혼여족인 저는 낯선 이곳이 조금 무서워서 바람이 심히 부는 해변가 산책도 못하고 잠들어 버려 조금은 아쉬운 셋째 날 밤입니다.
아주 오랜 시간 푹 자고 아침 8시쯤 일어나니 날씨가 끝내주네요. 지난 이틀간 제주바람의 매서운 맛을 제대로 맛봤다면 오늘은 걷기에도 꽤 기대되는 햇살입니다. 바닷바람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지만, 화창한 날씨에 희망차게 걸음을 옮겨봅니다. 우선 올레길 20코스를 따라 월정리에서 한동리까지 걸어보려 합니다.
투명한 바닷가와 하얀 고운 백사장을 보니 이곳이 왜 서핑지로 각광받는지 알 것 같네요. 어제 택시 아저씨 말씀으로는 최근 부동산 가격이 제일 상승한 곳이라며 작은 동네가 너무 빨리 상업화되어 간다는 말씀을 하신 것이 생각이 났습니다. 저는 그저 한적하고 조용한 곳으로 남아줬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걸어봅니다.
바다를 지나 올레길을 따라 걸으니 나오는 시골길. 이곳에서 다시금 울컥해짐을 느낍니다. 검고 구멍이 숭숭 뚫린 현무암 돌벽으로 피어난 노란 유채꽃밭 그리고 풍력발전소에서 돌아가는 거대한 바람개비. 이곳에서 숨 쉬고 그대로 느끼는 이 순간 살아있음이 마음 가득 차오릅니다.
오늘은 자연을 가득 마주하고 충분히 걸어보기로 합니다. 월정리에서 한동리로, 한동리에서 평대리, 다시 세화리까지 걸어 세화 해변을 바라봅니다. 걷다 지칠 때 마음에 드는 카페를 발견하면 그곳에서 당근주스와 당근케이크를 맛보는 것이야말로 구좌읍에서 해야 할 to do list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평대리에서 쉬어간 서점 '달 책 빵'을 들렀다가 '바다 맛'이 나던 성게국수를 먹고 해녀들의 쉼터를 지나 세화 민속오일시장에 도착했습니다. 오늘은 오일장이 서지 않는 날이라 요일 체크를 한 후 버스를 타고 종달리로 넘어가 보았습니다.
종달리에 내리자마자 초등학교 풍경이 정겹게 느껴져 매우 소박한 행복을 느낍니다. 렌터카 서비스를 이용하고 싶은 마음이 매분 저를 유혹하지만 걸어서 만나는 이 행복 모먼트를 아주 충분히 즐겨보려고 합니다. 아마 차 타고 돌아다니면 다시 효율성을 생각하고 그러다 보면 여기저기 가지 못해 안달이 날 테니까요. 아직은 서늘한 바람이, 따뜻한 햇살이 조바심 내지 말고 여유를 가지라고 저를 쓰다듬어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