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향기가 마스크 너머 콧잔등을 간지럽힐 때

제주 3주 살기

by 아는언니
아는언니야, 밝을 때도 혼자서는 외진 곳 다니지 마~

친구는 전화통화로 엄마처럼 저의 안부를 걱정합니다. 그 걱정 다 아는데... 마음에 넣어두고 아침 8시 반쯤 섭지코지로 출발합니다. 새로 옮긴 숙소에서 섭지코지와 성산일출봉이 걸어서 한 시간 내외라고 지도 앱이 말해줍니다.


완만한 섭지코지를 천천히 음미하며 걸을 때 한 대단한 결심


오늘 오전의 목표는 오직 섭지코지로 정했습니다. 천천히 느리게 한 걸음씩 내딛으면서 온몸으로 제주의 봄기운을 느낍니다. 오늘은 전과 달리 외투를 벗어던지고 티셔츠차림으로도 충분한 따뜻한 온도지만 바람은 역시나 매섭습니다. 아직 순한 맛을 선사하지는 않는 제주의 바람.


섭지코지 가는 길 유채꽃밭


걸어가다 보니 말과 승마를 할 수 있는 들판이 보입니다. 부모님과 함께 인생 최초로 제주도에 왔던 초등학교 3학년의 '아는언니'가 생각납니다. 부모님도 신혼여행 이후로 처음 저와 여동생을 데리고 여름휴가를 왔었고, 함께 처음으로 말을 탔던 기억이 사진 한 장으로 지금까지 소환됩니다. 그때의 부모님 나이가 지금의 제 나이쯤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나이가 되도록 결혼 생각 없는 딸을 부모님은 철부지라 생각하십니다. 그런데 이제는 부모님 기대에 맞춰 살고 싶지 않습니다. 더욱더. 제 효도는 아마도 학창 시절에 다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에 10년 넘게 다닌 것도 결국은 부모님께 '대기업 다니는 딸'이란 자랑거리를 잃게 할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부모님 만족을 위해 더 할 이유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저 이 회사에서 취할 이익이 있다면 더 일할 뿐. 분명한 건 이 회사에서 일하면서 혼자는 결코 얻지 못할 많은 일 경험과 사람을 얻은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더 이상 누군가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한 변명뿐인 위로로 저를 소진하지는 않아야겠다는 다짐을 해봅니다. (절대로 당장 회사를 그만두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독자님들 오해 마시옵소서...)


섭치코지를 오르는 길에 바라보는 바다와 저멀리 상산일출봉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걷다 하다 보면 노란 꽃과, 푸른 숲을 지나 파란 바다가 보이는 고지에 다다릅니다. 잠시 벤치에 앉아서 오늘 처음으로 간식을 먹으며 당 충전을 합니다. 어제 산 천혜향을 까서 한입 먹으려는 순간 소풍 오신 어머님 무리가 사진을 찍어달라고 하십니다. 평소의 저라면 예민해졌을지도 모르지만, 여유로워지기로 하고 사진을 찍어드립니다. 연이어 또 다른 어머님 부대가 "우리도 사진 찍어주셔요!"하고 당당하게 요구하시는데, 먼저 찍은 어머님이 "아이고, 이 아가씨 식사해야 해요~내가 찍어줄게."하고 제 마음을 대변해주십니다. '센스 있는 어머님~'


우연히 만난 안도 타다오의 건축물과 유민 미술관


'걸어서 음미하는 섭지코지가 이렇게 좋을 줄이야...' 더 행복했던 것은 세계적 건축가 안도 타다오의 건축물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건축을 잘은 모르지만 안도 타다오는 어렴풋이 알고 있고, <민트>라는 이름의 카페 건축물이 섭치코지의 자연과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글라스 하우스>란 정원도 거닐어 보입니다.


안도타다오의 <민트><글라스하우스>

정말 좋았던 것은 <유민 미술과>을 발견하고 들러본 것입니다. 마음이 지쳤을 때 미술로 힐링을 받았고 그래서 관심을 갖고 미술을 읽으려 했던 때가 기억납니다. 이번 기회에 더욱 느리게 여행하기로 하고 미술관으로 들어가 봅니다. 미술관으로 입장하는 길 자체가 주는 힐링이 온몸을 감쌉니다.

미술관 전시장으로 들어가는 길목도 아트


유민 미술관의 '아르누보' 컬렉션이 진행 중이었습니다. 때마침 참으로 어울리는 전시 주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연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런 감흥도 없다.
꽃과 나무, 나비와 잠자리, 바다와 하늘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 자체가 아름답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이러한 자연을 통해 우리 자신의 정서와 경험, 기억을 들여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
에밀 갈레. 유리공예가


자연이 보여주는 상징세계를 겸손한 자세로 관찰함으로써 세상의 순리를 이해하고, 마침내 인간과 자연이 조응하기를 바란다는 전시의도는 지금의 제 마음에 충분한 공감을 주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저는 계속 걷고 있었고, 계속 누군가와의 추억을 떠올리고 있었고, 여행에서 만난 새로운 인연들을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솔의 향기가 남은 성산일출봉



유민 미술관까지 둘러보고 나니 오전이 다 지나고 허기진 배를 전복 뚝배기로 따뜻하게 채웁니다. 이제 혼밥 스킬은 더욱 레벨업이 되어 꽃게와 조개까지 야무지게 남김없이 쪽쪽 빨아먹습니다. 밥 먹고 너무 피곤해서 숙소 가서 잠 시 쉬고 싶은 마음으로 걸어가고 있는데, 아까 식당에서 맞은편에서 혼밥 하던 아저씨가 저를 보고 말을 겁니다.

"혼자 왔습니까?
저도 혼자 왔는데 성산일출봉 같이 가시렵니까?"


'이건 길거리 헌팅도 아니고 머람?' 유럽여행을 할 때는 동행 구하기 사이트에서 수시로 여행자 동행을 구해 함께 식사도 하고 맥주도 마시고 광광하며 사진도 찍어주곤 했습니다. 제주도 여행에서는 그런 것이 없어 약간은 서먹하고 혼자 걷기도 좋지만 지칠 무렵, 거의 아버지뻘 되시는 분이 저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혼자 여행하고 싶은 마음이 커서 망설였지만, 송당 별장에서 젊은 친구들과 많이 어울렸다면 연륜 있는 여행친구와도 이야기를 나눠보고도 싶었습니다. 다만, 오전에 많이 걸은 만큼 몸이 너무 지쳐 성산일출봉까지는 오를 수 없을 것 같다고 정중히 사양하려는 찰나였습니다.


"오르다 힘들면 중간에 내려옵시다." 하시며 성산일출봉 티켓 두장을 그냥 끊어버리십니다.

'뭐지 이 상남자 st'


섭지코지가 완만했다면 성산일출봉은 가파른 계단의 연속입니다. 혼자 여유로운 여행하고 싶은데 갑자기 생긴 추진력 있는 이 여행 동지에게 말린 것 같은 기분에 '숙제라면 빨리 마쳐야겠다.'라는 심정으로 돌계단을 오르기 시작합니다. 냉정하게 제안을 거절하지 못하는 제 자신이 또 미워지려고 합니다. 제 마음을 눈치챘는지 "힘들면 쉬엄쉬엄 가요. 올라갈 때는 힘들어도 올라가 보면 잘했다 싶을 거예요. 저는 군생활을 제주도에서 했고 대학에서 교수로 6년을 보내면서 학생들 데리고 제주도를 많이 왔어요. 성산일출봉을 한 10번은 오른 것 같네요."라고 이야기를 하십니다.


아직 경계하는 마음이 한가득입니다. 그가 계속하는 말들을 일출봉을 오르면서 마스크를 끼고 터질 것 같은 심장을 느낄 때마다 조금씩 숨을 고르며 풍경을 보며 흐르듯 넘겼습니다. 마스크를 통해서도 느껴지는 상쾌한 솔내음이 기분을 달래줍니다. 오로지 그 향기만을 느낍니다. 아마도 솔잎향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 와중에 느껴지는 솔향은 향수로 담아가고 싶을 만큼 은은하지만 강렬하게 기억됩니다.


성산일출봉 꼭대기에서 내려다보는 풍경

"성취감 있죠?"

"성취감 같은 거 느끼고 싶지 않아요." 제가 말하고도 약간은 가시를 잔뜩 담아 내뱉은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제 여행의 페이스를 갑자기 잃은 것만 같았습니다.

"많이 지쳐 보이네요. 서울에서 돈 세다 잠들었나?"

"도... 돈 세다요?"

"돈 버느라 일만 죽어라 했냐고요?"

"돈이나 많이 벌면 낫죠. 내 돈도 아니고 남의돈 벌어주느라 시키는 일만 죽어라 하다가 지쳐서 내려왔네요. 쉬려고요."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나 봅니다.

"한숨 쉬지 말아요. 그것도 버릇이야."

"아... 한숨 쉰 거 아니에요. 숨차서 숨 고른 거예요." 아마도 저도 모르게 지친 기색을 내뱉은 것 같습니다.


그런저런 대화를 하면서 약간의 경계심이 풀어졌습니다. 이십 대 젊은 친구들에게는 이야기할 수 없었던 마음 깊은 곳의 지침과 고민들을 그가 눈치채고 문을 두들였기에, 자연스럽게 풀어낼 수 있었습니다. 입장료를 내주시고 어찌 보면 혼자는 절대 오르지 않았을 성산일출봉을 엉겁결에 오른 것에 대한 보답으로 '천혜향 100프로 주스'를 사드렸습니다.



처음 만난 여행친구 덕에 가시리 유채꽃 도로를 드라이브하다


"여태껏 차 없이 걸어 다녔어요? 오늘은 내가 기사 해줄게요. 가고 싶은데 다 말하슈." 이래도 되나 싶었지만 그동안 걷는 것이 너무 고되어 이제는 차로 이동하고 싶었습니다. 제주에 온 지 오일째. 뚜벅이 여행에 진짜 지쳤습니다. 그래서 보고 싶었던 벚꽃도로 '가시리의 녹산로'에 가보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제일 좋은 날씨에 만개한 꽃이 져버릴까 조바심 나던 마음도 있었습니다. 어느새 보조석에 타고 녹산로로 향합니다.


"엄청 지쳤었어요. 한 회사, 같은 빌딩에만 13년을 일했는데 이번에 승진이 누락됐어요. 남자들은 형 동생 하면서 동료애라도 있죠. 여자는 진짜 외롭게 버티면서 무얼 바라 이러고 있냐는 생각이 들었어요. 용기 내서 3주 휴가 쓰고 싶다고 상사에게 말했어요."라고 제주에 오게 된 속내를 털어놓습니다. 잘 모르는 사람이고 또 볼일 없는 사람이라 오히려 마음을 꺼내기 쉬웠습니다. 말하면서 또 눈물이 났습니다. "사실 승진 안 한 게 더 좋아요. 알아요. 고가만 잘 받고 인센티브만 잘 받으면 돼요. 일한 만큼 돈 받으면 괜찮아요. 근데 이상하게 속상해요."


"그죠. 인정받는다는 느낌이 필요하죠. 승진이라는 목표 하나를 바라보고 달리다가 멈추니 허무함이 들었군요. 그런데, 회사에서 경쟁하는 것 너무 연연하지 말아요. 상사가 승진시킬 수 없는 상황적 이유가 있었을 거예요. 회사가 경쟁시스템이긴 하지만 하나하나 다 이기려고 하면 본인이 지쳐요. 그냥 져주세요. 이런 상황에서는 져주고 상사에게 요구하세요. 하나 져주고 두세 개 요구해서 얻어내세요. 그게 남는 겁니다. 이렇게 휴가를 얻어낸 것처럼..."


"진 사람은 요구할 힘이 없잖아요.?"


"어쩔 수 없는 상황이란 게 있을 겁니다."


"대신 이겨야 할 상황에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겨야 해요. 양보하고 내가 후회하는 것은 아무 힘이 없어요. 이기고 베풀어야지, 지고 나면 요구하는 게 다 구걸하는 것처럼 상대는 느낍니다. 그럼 상대가 본일을 만나길 꺼려할 거예요. 승부의 상황에서는 무조건 이겨야 합니다."


대학에서 교수로 6년을, 그리고 자기 사업을 차리고 오너로 운영해보신 분이라 연륜이 느껴졌습니다.


가시리 녹산로 유채꽃도로

가시리 녹산로 유채꽃 도로는 황홀하게 이뻤습니다. 여의도 벚꽃 명소 윤중로의 벚꽃보다 신기했던 건 제주 가시리의 유채꽃 명소는 위로는 하얀 꽃잎이 흐드러지고, 아래로는 노란 유채꽃이 한가득이란 것입니다. 도로변이니 이 색감의 조화는 누군가 인공적으로 기획한 것일까요? 인공과 자연을 이렇게 아름답게나 의도적으로 조화시켰다면 그는 색감의 천재일 것입니다.


오늘의 만남이 너무 신기해서 숙소로 돌아와 친구에게 털어놓았습니다. 친구가 다 듣더니 "너 인복 있다. 근데 다음부터는 모르는 사람 차 타지마."라고 엄마맘으로 이야기합니다. 카톡 너머 친구의 눈흘김이 보이는 듯합니다. 오늘은 제주의 화산 폭발이 남긴 유산을 온몸으로 느꼈습니다. 종아리가 너무 부어서 푹 쉬고 싶습니다.


알아, 네 엄마 마음.
네가 말한 대로 조심은 해야겠지만
나는 이렇게 모르는 사람과의 대화에서
치유받는 여행의 힘을 믿어.
걱정시키지 않게 연락 자주 할게~
귀찮아하지 말고 받아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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