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3주 살기
종달리 카페 <엉물>에서 당근 수프로 아침을 시작
약간 컨디션이 좋지 않은 채로 아침을 시작합니다. 간밤에 배가 아파서 무리하지 않기로 하고 이전에 예약해놓은 이벤트를 행하러 종달리 마을로 향합니다. 며칠 전 들렀던 너무나 좋았던 카페 <엉물>에서 브런치로 당근 수프를 먹어봅니다. 저만의 여행 모토 '하고 싶은 것은 망설이지 않고 하기' 프로젝트의 일환입니다. '당근 수프가 이렇게 맛있을 줄이야.' 구좌읍이 당근 산지로 유명한데 당근은 특히나 지용성이기 때문에 열을 가한 수프를 먹는 건 금상첨화라는 생각을 합니다. 여유로운 아침에 따뜻한 수프를 먹으니 몸 컨디션이 조금씩 살아납니다.
종달리 <필기>에서 아날로그 타자기로 '가족, 행복, 여유'를 쓰다
사실 오늘의 메인이벤트는 미리 예약한 아날로그 타자를 치는 '글 쓰는 공간'을 대여한 것입니다. <필기>라는 곳인데, 문구를 팔면서 한편에서는 1시, 3시 하루 두타임 타자기로 글을 쓸 수 있도록 예약제로 운영을 합니다. 코로나 이후 글쓰기로 큰 힐링을 받았던 저는 제가 관심 있는 모든 것들을 다양하게 체험해보기로 하고 이곳에 마음먹고 오게 되었습니다.
제일 먼저 타자기를 사용하는 법을 설명 듣습니다. 타자기는 모음과 자음이 따로 하나씩 세겨있어, 자판을 누를 때마다 그 힘으로 종이 위에 잉크를 묻힌 자판이 압력을 가해 원하는 글자가 종이 위에 찍히는 원리입니다. 그래서 컴퓨터 자판과 다르게, 타자기는 받침이 있는 글씨를 쓸 때 스페이스바를 활용해야 하고, 쌍자음이나 모음을 타자할 때 방법이 다릅니다. 타자기에 종이를 넣는 방법부터, 왼쪽 레버를 눌러 종이를 왼쪽에서부터 글 쓸 수 있도록 조정하는 방법 등이 낯설어, 설명을 들어도 실제로 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됩니다.
설명이 끝나고 약 한 시간 반 정도 저 혼자서 타자로 글쓰기를 할 수 있습니다. 제주도에 와서 글 쓴 것 중 일부 글귀를 타자기에 쳐봅니다. 받침이 있는 단어와 이중모음이 들어간 단어가 특히 계속 오타가 납니다. 받침 있는 글씨를 쓸 때는 '자음+스페이스바+ 모음+받침 자음' 순서로 타자로 쳐야 하므로 익숙하지 않은 저는 몇 번이나 오타를 냅니다. 또한 타자를 칠 때 너무 힘이 들어가면 잉크가 이중으로 번지고, 힘을 살짝 주면 또렷하지 않으므로 힘 조절해서 명확하게 잉크가 종이에 묻도록 하는 것도 꽤나 신경 쓰이는 일입니다
연습 종이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를 적어보았습니다. 제주 여행 중 마음에 세긴 글귀, 여행 중 자꾸만 생각나는 가족에 대한 애증, 서운함 그리고 그리움을 반복해서 타자로 칩니다. 반복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자꾸 오타가 나니까...연습 글귀가 점점 짧고 간단해지고 있습니다.
연습 글귀 첫째
문득 어릴 적 아빠와 함께 갔던 아빠의 고향, 할머니 댁 마은 어귀에 있었던 아빠가 졸업한 초등학교가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이 여행 중에 떠오르는 부모님 얼굴.
부모님과 함께하던 어린 시절 추억이 떠오를 때 그립고 또 안타깝습니다.
세월이 너무 많이 흘러버린 것이...
제주에서 직접 쓴 글 중 일부
연습 글귀 둘째
자네가 불행한 것은 과거의 환경 탓이 아니네.
그렇다고 능력이 부족해서도 아니고,
자네에게는 그저 용기가 부족한 것뿐이야.
말하자면 행복해질 용기가 부족한 거지
아들러의 <미움받을 용기 중>
연습 글귀 셋째
하지 않을 수 있는 힘
머뭇거리는 능력
깊은 심심함
<수상한 소금밭> 바닥에서 본 글귀
원하는 글귀를 오타 없이 쳐낼 때까지 꼬박 한 시간을 집중하며 쓰고 또 씁니다. 약 4장을 연습으로 써낸 후, 이용시간이 삼십 분 남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마지막 종이에 혼신의 힘을 다해 오늘의 결과물을 만들어내려고 합니다. 이렇게 오롯이 이 제주여행에서 기억에 남는 것을 계속 떠올리며 약 두 시간 동안 '가족, 행복, 여유'에 대한 타자를 치고 그것을 한 장으로 남겨 봉투에 넣고 씰링을 하고 나니 너무나 충만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거 누구에게 선물할 건가요?"
"제 자신에게 요. "
어느 여유의 잃을지 모르는 서울, 미래의 저에게 제주도의 기억을, 그리고 인생의 중요한 것을 잃지 않도록 나에게 선물하려고 합니다. <필기>를 나오는 길에 손도 한가득, 마음도 한가득 채워옵니다.
인심 좋은 종달리 주민과 리얼 대화를 나누다
저녁식사는 특별한 곳에 예약했는데 예약시간까지는 두 시간이나 남았습니다. 너무 집중을 했는지 허기가 져 잠시 간식거리를 찾습니다. 종달리 마을 지도를 보니 분식점이 있습니다. 오전에 수프만 먹은 지라 떡볶이라도 먹을 요양으로 유일한 분식점으로 향합니다.
그런데 문을 열고 들어서니 떡볶이는 팔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냥 나오려니 민망해서 올리브유로 만든 빵을 시켰습니다. 간단히 먹고 있는데, 주인분이 주문도 안 한 음료를 내미십니다. 열대과일 주스청을 물에 탄 주스를 주십니다. '와... 이런 인심 제주도에서 처음이야.' 약간 놀랐는데, 계속 말을 걸어주십니다.
"혼자하는 여행 좋죠?"
"네. 너무 좋아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이렇게 쉬고만 싶어요."
"일이든 사람이든 뭔가 많이 치여서 지쳐 보여요."
무언가 들킨 것 같은 기분에 화제를 전환합니다.
"이런 곳에 살면 정말 좋을 것 같아요."
분식집 주인분도 무언가 사람 냄새나는 대화가 그리웠던 것 같습니다. 본인은 이 종달리에서 태어나서부터 지금껏 살아왔는데, 이 마음이 외지에서 온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토종 제주인과의 보이지 않는 선이 있다며 안타까운 마음을 표현했습니다. 그들이 오면서 이곳 사람들 위주로 조화를 이루기보다 그들이 원래 도시에서 누렸던 것을 누리지 못함에 답답해하기도 한다는 이야기도 전해 들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종달초등학교가 특성화 학교라 외지인이 제주체험학습을 위해 이곳에 많이 오면서 기존에 없던 학부모의 적극적인 참여 문화가 토종 제주인에게는 낯설다는 솔직한 심정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고양이와 강아지가 유난히 많아 유기견에 대한 시설이 부족함을 안타까워하는 이야기도 했습니다. 가게를 운영하는 일, 과일을 재배하는데 관심이 있다는 이야기, 새로운 공항이 들어서는 난산리 이야기도 들으며 현지분들의 관심과 고민들을 들을 수 있는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함께 이야기하다 보니 기다리는 시간이 따뜻하게 채워졌습니다.
<종달리엔>에서 혼술 (ft. 제주 맥파이 봄마실)
오늘 저녁식사는 며칠 전부터 인스타그램으로 예약해둔 곳입니다. 혼술족을 위한 자리와 메뉴가 있다는 추천을 받아 간 곳입니다. 미리 인스타그램 DM으로 주문한 생선 튀김이 메인 요리로 나오고, 음료는 제주에 브루어리가 있는 맥파이의 시즌 한정 맥주인 '봄마실'을 주문합니다.
혼술이 '왕따의 상징'이 아니라, 혼자만의 사유와 온전한 음식과 술을 음미하는 시간으로 탈바꿈합니다. 그리고 그런 문화가 이렇게 자리 잡은 것이 너무나 좋습니다. 맥주와 생선 튀김이 찰떡궁합으로 잘 맞아 행복한 혼술을 즐기고 버스를 타고 숙소로 돌아갑니다.
브런치, 타자기 치며 좋은 글귀 마음에 세기기, 제주 양조 맥주와 생선 튀김으로 혼술 즐기기 이렇게 혼자만의 여행이 충만하고 꽉 채워 짐에 너무나 행복하게 마무리합니다. 혼자도 이렇게 행복한데, 혼자도 이렇게 충만한데. 일상의 지침을 제가 좋아하는 것들로 채우며 저만의 방식으로 여행함으로써 충분히 충전하는 느낌이 가득한 기분 좋은 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