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가 이렇게 아름다운 이유는 아픔을 품었기 때문일 듯

제주 3주 살기

by 아는언니

아침부터 엄청 흐리고 일기 예상을 보니 오후에는 강수확률이 40%를 넘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한 이곳에서 저는 또 걸으러 나갑니다. 그냥 하루하루 눈앞에 닥친 것만 생각하기로 한 오늘의 과제는 올레길 10코스를 걸어보는 것입니다. 9코스는 산속을 워낙 힘들게 갈어야 한다는 후기들이 있어서 10코스를 걷기로 하고, 역방향으로 걷는 게 좋다 하려 버스를 타고 모슬포항으로 향합니다.


어제 게스트하우스 사람들과 신나게 맥주를 마신 게 영향을 미쳐 속이 계속 매스껍습니다. 나이가 먹음을 느낍니다. '진짜 예전엔 술 잘 마셨는데...'이렇게 맥주 두 캔과 한라산 몇 잔에 흔들리는 나라니...아는언니...다 죽었네...' 하는 씁쓸함 때문인지 버스에서부터 엄청 피로함을 느낍니다. '아 그냥 오늘 걷지 말고 숙소에서 잠이나 잘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밀려옵니다. 그러나 어김없이 버스가 목적지에 다 달았고 모슬포항에 막상 내리니 또 걷고 있는 저를 발견합니다.


송악산을 방향 삼아 올레길 10코스 걷기 시작


오늘은 처음으로 올레길 완주 스탬프도 발견해서 손등에 도장을 꾹 찍고 시작합니다. 아직 올레길 패스포트가 없는 저는 초심자. 10코스가 좋다는 평은 많이 들었는데 참 이쁩니다. 가파도와 마라도로 가는 선착장이 나오기 전 청보리밭을 지나는데 참으로 아름답네요. 농촌의 일하는 분들이 간간히 보여서 자연과 공존하는 농사일의 엄숙함도 잠시 생각해봅니다. 논밭을 지나 어느새 바다로 이어집니다. 하모해수욕장을 지나면 이번에는 또 산속 길로 이어지는데 올레길 한 코스 안에 기승전결이 있듯 정말 각각 다른 매력의 제주 자연을 만나게 됩니다. 걸으면서 계속 보이는 송악산이 10코스의 상징이 아닌가 싶습니다.


올레길 10코스는 바다 숲 논밭을 지나며 기승전결을 보여주는 듯


다크투어리즘의 성지 올레길 10코스


10코스에 대한 사전 정보가 그리 많지는 않았는데 정말 잊지 못할 것 같은 이유 중 하나는 10코스가 '다크투어리즘'의 성지임을 온몸으로 걸으면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처음엔 '다크투어리즘'이 무엇인지도 생소합니다 생소합니다. 이는 전쟁, 학살 등 아픈 역사의 현장을 통해 반면교사로서 교훈을 세기는 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독일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유대인 학살을 현장을 통해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반성하고 잊지 않기 위해 남겨둔 역사의 현장을 꼽을 수 있습니다.


알뜨르 비행장 관제탑과 격납고


제주도는 참으로 아름다운 곳이지만, 아픈 역사와 육지에서 떨어져 소외된 아픔을 가지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걷다 보니 만난 알뜨르 비행장 관제탑과 격납고를 보며 생각한 것입니다. 느닷없이 아름다운 자연에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의 어두운 그림자들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일제 침략기에 이곳이 군사 비행장으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호기심으로 둘러보니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 때 일본이 이곳을 발판으로 세계로 전쟁을 벌이기 위해 군사훈련 및 전투기 출격을 진행했고, 곳곳에 군사 물품을 저장하는 저장고가 남아 있었습니다. 태평양 전쟁 때 가미카제(제2차 세계대전 때 폭타니 장착된 비행기를 몰고 자살 공격을 한 일본군 특공대)를 했던 전투기가 이곳에서 출격했다고 하니 이 곳을 바라보는 마음이 아찔 했습니다.

알뜨르 비행장 관제탑과 격납고를 지나 평화의 상징 <파랑새> 조형물을 바라보다


제주 사건 (통칭 43 사건)의 현장을 보다


이어진 현장은 제주 43 양민 학살터였습니다. 마침 오늘은 4월 1일. 4월 3일을 앞두고 이곳으로 오게 된 것이 운명처럼 느껴졌습니다. 제주 43 사건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지만 우연히 지인이 연출한 대학로의 연극을 본 것이 떠올라 그 상황에 대해 생생하게 상상해 볼 수 있었습니다. 아무 죄 없는 사람들이 갑자기 끌려가 죽음을 당하고 유족의 시신 조차 찾을 수 없었던 그때 제주가 얼마나 어둡고 암울했을지 마음 한편이 저리는 느낌이었습니다. 학살터 옆에서 위령 추모비가 있어 그들의 영혼을 조금은 안아주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하며 아픈 마음으로 걸음을 옮겼습니다.


43 위령 추모비와 터


아픈 역사의 현장을 뒤로하고 송악산 둘레길 근처에 다다랐을 때 점점 빗방울이 굵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바닷바람과 함께 날아오는 빗방울이 뺨을 때리는 것은 마치 작은 돌멩이를 맞는 느낌이었습니다. 우박이 내리는 것인가 싶어 하늘을 쳐다 보기도 했습니다. 역시 날씨에 큰 영향을 받는 곳인 만큼 인상 깊은 이 올레 10코스를 완주를 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남긴 채, 비를 피할 곳을 서둘러 찾습니다.



송악산 둘레길을 앞두고 비바람을 피해 카페로 들어가다


아름다운 제주의 속살을 보는 느낌으로 시작해서 아픈 역사 현장까지 보고 송악산 둘레길에 눈앞에 둔 채 거센 비바람을 피해 찾은 쉼터가 아주 제대로였습니다. 우아한 회색 고양이와 귀여운 새끼 고양이를 본 순간 고단한 몸과 마음이 힐링되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몇 시간이 지났을지 모르게 편안하게 책을 읽고 글을 썼습니다.


어느 정도 비가 그치길 바라는 마음으로 밖으로 나섰으나, 비는 도무지 그칠 줄 몰랐습니다. 강풍에 우산은 아무 소용이 없었고, 심지어 그냥 뒤집혀버립니다. 그 비바람 속에서 언제 도착할지도 모르는 버스를 기다리는 것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것이었습니다.


제주의 인심을 보다


따지고 보니 오늘 하루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했습니다. 배도 고프고 힘이 들었습니다. 근처에 보이는 식당으로 들어가 뭐라도 따뜻한 것을 입에 넣고 싶었습니다. 무작정 들어간 식당에서 뚝배기를 시키고 허겁지겁 밥 한 공기를 다 비웠습니다. 손님은 저뿐이었고 사장님과 계속 집에 갈 버스가 언제 오는지 걱정스러운 대화를 나눴습니다. 이곳을 지나는 버스는 한 시간 간격으로 지나기도 하고, 비바람에 언제 올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택시라도 부를 생각으로 계산을 하고 식당을 나서려는데 사장님께서 친구분께 "이 아가씨를 가까운 버스 정류장까지 데려다줘."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마치 시골에서 할아버지가 동네 친구 분께 부탁하는 챙겨주심에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그래도 미안한 마음에 한사코 거절했으나 혼자 비를 뚫고 나서는 것도 무섭고 그 감사를 그저 고맙게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차를 타니 할아버지께서 이것저것 물어보셨습니다. 여행 온지는 얼마나 되었는지, 혼자 하는 여행이 재미있는지, 위험하지는 않은지 등등 으레 받는 질문입니다. 이전 같았으면 꼬치꼬치 캐묻는 것이 싫었겠지만, 이방인에게 베풀어 주는 이 친절이 너무 감사해서 성의껏 답변을 드렸습니다. 혼자 하는 여행이지만 전혀 외롭지 않고 오히려 매우 즐기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게스트하우스에 돌아가면 저처럼 혼자 여행 온 새로운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여행의 매력이라도 이야기했습니다. 할아버지는 본인은 하실 생각이 전혀 없으나, 그게 여행이라 하니 머리로는 이해하려 하시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근체의 환승버스 정류장에 내려주시고 우리는 쿨하게 인사를 하고 헤어졌습니다. 차에서 내리고도 버스에 배차간격을 살펴보니 30 분 이상 기다려야 했습니다. 또한 갈아타는 구간에서도 다음 버스를 얼마나 기다려야 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몸이 정말 지쳐서 그냥 택시를 타고 숙소로 돌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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