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3주 살기
혼자 여행은 좋기도 하지만, 외로울 때도 많았습니다. 서울에 있을 때는 사람들에, 일에 치여 힘들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차도 없이 뚜벅이로 제주에서 지낸 일주일 동안 나름 힘든 면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친구가 휴가를 내고 제주도로 내려와 렌터카로 이동하며 함께 4일을 보내니 좋은 점이 참 많았습니다.
술을 마실 때 여러 개의 안주를 시킬 수 있다
이날은 비가 와서 오후에 맥주 브루어리에 도착했을 때는 흐리고 비가 맺혀있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창밖으로 운치 있게 맥주를 즐길 때에는 더할 나위 없이 분위기 있었습니다. 매일 혼자 먹던 식사가 아닌 누군가와 함께 즐기고 나눈다는 것이 참 좋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만 시켜먹는 것이 아닌, 음식 몇 종류를 시켜 나눠먹는 것이 이렇게 좋다니... 사람이 그리웠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니, 술과 함께할 여러 종류의 안주만큼 풍성한 오랜 친구와의 대화가 그리웠다는 생각이 듭니다.
친구가 오면 꼭 찾아보고 싶던 친봉 산장도 찾아가 보았습니다. 왠지 이곳은 혼자 오기 싫어서 아껴뒀던 곳인데, 깊은 산장에서 캠핑하는 기분을 느끼며 피어오르는 모닥불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마음이 참 따뜻하고 편안했습니다.
2인분부터 주문 가능한 생선구이를 드디어 먹다
또 혼자서 절대 할 수 없었던 생선구이 정식을 먹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대부분의 생선구이 메뉴가 2인부터라 혼자서 시켜먹을 수가 없었는데, 제주에 온 지 일주일 만에 처음으로 먹고 싶던 갈치구이를 먹는데 정말 기분이 좋았습니다. 제주갈치 살이 어찌나 통통하게 차올랐는지 살만 발라서 숟가락에 가득 담아 먹는데 입에서 사치를 하는 기분이 들더랍니다. '나 이렇게 잘 먹어도 돼?'싶을 정도로요.
혼고기굽굽은 아직 무서워! 드디어 제주 흑돼지를 먹다
그리고 흑돼지구이도 드디어 먹었습니다. 혼 여행 최고 난이도 레벨 중 하나가 혼자 고기 구워 먹기인데, 여태껏 혼밥 잘해왔지만, 왠지 흑돼지구이도 혼자 하기 싫어서 남겨놓았던 버킷리스트를 하나씩 지워가는 기분이 참 좋았습니다. 그리고 육즙이 온 입안을 감싸던 감격의 순간을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드라이브로 제주를 더욱 즐기다
운전을 잘하는 친구가 렌터카와 함께 왔기에 해안가 도로로 드라이브를 마음껏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제주에서 자연사진이 아닌 제가 주인공이 되는 사진도 찍었습니다. 그 간 셀카 한 장 잘 안 찍었었는데 기분이 참 좋았나 봅니다.
혼자 여행할 때는 제주 동쪽에서 시작하여 남쪽으로 내려왔다면, 차로는 동쪽 해안도로를 달리며 북쪽까지 올라가 봅니다. 신창 풍차 해안도로, 도두동 무지개 해안도로를 달리며 서쪽과 다른 깊은 바다라 더욱더 어둡고 세찬 바다가 바위에 내리치는 제주의 해안을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
운전을 잘하는 친구를 보조석에 앉히고 저 또한 드라이브를 해보았습니다. 교통이 복잡한 시내가 아닌 한산하고도 굽이치는 제주도로를 드라이브하는 기분이 짜릿했습니다. 특히 한라산을 가로질러 남쪽에서 제주 공항 쪽으로 올라가는 드라이브코스는 최고였습니다.
새별오름과 나홀로 나무를 보며 사랑을 생각하다
혼자서는 날씨를 핑계로 차가 없음을 핑계로 지쳐있음을 핑계로 오리지 않았던 오름도 처음으로 올라가 보았습니다. 새별오름이었는데 생각보다 힘이 크게 들지 않고 제주도 정경이 잘 보여서 오르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새별오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던 나홀로나무를 마주한 것도 참 좋았습니다.
나홀로 나무는 허허벌판에 혼자 서있는 분위기로 인스타그램 명소로 더욱 알려져 있지만, 한편으로 그동안 저의 모습이 이렇게 홀로였지 않나 싶어서 더 마음이 가는 장소입니다. 혼자라 느껴서 외로웠고, 일하면서 지쳤고, 그래서 상처 받고 힘들다 느꼈던 게 아닌가 생각했었습니다. 그리고 진부하지만 혼자 가면 오래 못 가고 같이 가면 길게 갈 수 있다는 말이 자꾸 떠오르던 혼 여행의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누군가에게 상처 받는 게 무서워서 힘과 능력을 가지고 싶었고, 그러다 보니 모든 것이 경쟁적이고 강해 보여야 한다는 생각에 주변을 오히려 제 스스로 고립시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혼 여행을 한 일주일간의 제주와 친구와 함께한 나흘간의 여행에서 인생의 방향성도 다시 생각할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친구와 함께 역할을 분담하고, 혹은 함께할 때, 더 많은 것을 경험할 수 있었고 더 행복했고 더 편안했던 것 같습니다. 더 많이 쉬고, 더 많이 자연을 느끼고, 더 많이 멍 때렸지만 결과적으로 덜 힘들고 몸과 마음을 푹 쉴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통나무로 지어진 숙소가 좋았던 것은 샛소리를 그대로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창을 열어두면 해변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통나무와 자연이 실내로 연결되는 것 같았습니다. 그 안에서 자연을 그대로 느끼면서 커피를 마시던 순간 친구가 이야기했습니다. "어디 카페 안 가도 되겠다. 쉬고 싶으면 여기서 푹 쉬자. 어디 꼭 돌아다니는 게 여행이 아니니까."
제주에서 읽던 책이 때마침 저에게 다가왔습니다. 혼자가 아닌 친구와 여행을 하며 더욱 실감한 인생의 동반자의 필요에 대한 생각들이었습니다.
삶이 도돌이표를 되풀이하며 머물러 있다고 느낄 때 사랑에 기대 보기를 바란다. 그나마 지켜온 작은 삶을 파면시키는 사랑이 아니라, 넉넉하고 괜찮은 사람이 될 수 있는 시작으로서 사랑은 좋은 동반자다. 망설임을 견디는 능력, 배반을 극복하는 힘,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결단, 결실이 없어도 한 방향으로 꾸준히 나아가는 인내 등을 우리는 사랑을 통해 배울 수 있다. 그래서 감히 말한다. 어른이 되려면 사랑을 해야 한다고. 사랑은 가족이 아닌 남과 얼마나 가까이 지낼 수 있는지 실험해보는 일이고, 또 너무 가까워지고 하나가 되고 싶은 욕망을 참고 나의 의존성을 인정하며 타인의 삶의 영역도 인정할 줄 아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다. '남'과 '님'은 한 끝 차이지만 핵심적인 한 획의 차이다. 둘을 제대로 구별할 줄 알 때 우리는 비로소 어른이 된다. 문제는 머리로는 배울 수 없고, 마음으로 몸으로 직접 겪어봐야만 한다는 것. 그걸 깨닫기 위한 여정은 괴로움보다 사실 즐거움이 많다. 사랑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대단한 쾌락을 선사하니 말이다. 마음은 있지만 짝이 없어서 하고 싶어도 못한다고? 지금 여기, 바로 옆에 그 사람이 있을 것이다. 잘 보이지 않으면 방의 불을 낮춰보라, 동공이 커지면서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그 안에서 빛나고 있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내가 찾는 그 사람이, 그 관계가. 그것이 사랑이다.
<사랑하기에 결코 늦지 않았다> 하지현 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