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3주 살기
제주도에 온 지 벌써 2주가 다되어 갑니다. 아무것도 계획 잡아하지 않고 그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시간들을 보내는데 집중하고 있습니다. 어제는 산방산 탄산온천에서 비바람이 몰아치는 노천탕을 제대로 즐겼습니다. 바람이 심하게 불어 정말 나무라도 뿌리째 뽑혀서 날아올 것 같은 날씨에 몸은 따뜻한 온천수에 담그고 있는 기분이 색달랐습니다. 나이트 온천을 즐기고 숙소로 돌아왔는데, 마침 4인실에 묶는 게스트하우스의 스텝 분도 주말 휴가를 맞아 4인실을 혼자 쓰게 되었습니다.
이제 혼자 있는 게 조금은 싫어지는 시점이라 일부터 밤늦게까지 숙소로 들어가지 않고 나름 분위기 있는 척 나이트 스파를 즐겨본 것입니다. 카카오 택시를 불러 숙소에 들어가니 밤 9시가 넘었습니다. 차 없이 제주도를 여행하기에 혼자서 이렇게 밤늦게 들어가는 것은 처음입니다. 돌아가는 길에 본 게스트하우스의 야간 식당도 운영하지 않습니다.
방에 들어서니 사장님과 남자 스텝 분만이 계시기에 인사를 하고 잠시 담소를 나누고 내일이 제 생일이라고 말하고 싶었나 봅니다. 그렇게 제주도에서의 금요일 밤은 조용하고 편안하지만 조금은 이방인의 외로움을 한 스푼 더한 그런 밤이었습니다.
타지에서 맞은 생일 아침 기억
나이가 들수록 생일이라는 날자 자체에 초연해지려고 합니다. 그날이 되면 우선 제일 먼저 부모님께 낳아주셔서 감사하다고 인사를 하고, 무탈 없는 날로 마무리하면 그걸로 충분한 기분입니다. 특히나 '타지에서 혼자 생일을 맞는다면, 그 건어 떨까?' 생각지 않았던 생일 아침을 맞았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부지런히 숙소를 옮길 준비를 합니다. 이제 남서쪽 생활을 정리하고 서쪽 해안을 제대로 경험할 마지막 한주를 향해 떠납니다. 최대한 조용하게 뚝딱뚝딱 짐을 싸는데, 스텝분이 조용히 내밀어 주신 미역국... 어제 함께 이야기했을 때 생일이라고 했는데, 그걸 잊지 않고 수줍게 내밀어 주신 미역국이었던지라 깜짝 놀랐습니다.
짐을 다 싸고도 예상했던 출발 시간보다 한 시간은 더 기다려야 하는데 남자 스텝분께서 말동무가 되어 주었습니다. 제주 여행 중 가장 좋았던 시간들에 대해 나누고 , 서귀포시 안덕면 안드르로라는 곳에 자리 잡은 이 조용하고 아기자기한 마을에서의 시간들이 우리 인생에서 얼마나 행복한 시간이었는지를 이야기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제가 제주도에서 가장 좋았던 시간 중 하나로, 구좌읍 종달리 <필기>라는 곳에서 아날로그 타자로 두 시간 동안 오타 없이 하나의 문장을 써내는 시간을 이야기했을 때, "어떤 문구를 타자로 쓰셨는지 여쭤봐도 돼요?"라고 물어보던 그 조심스러움이 기억납니다. "행복해질 용기"에 대해 이야기할 때쯤 사장님이 오셨습니다.
밝은 그녀가 생일 축하노래를 불러주고, 제가 화장실을 다녀온 사이에, 커스터드 크림 과자에 막대사탕을 꽂아 미니 생일 케이크를 만들어주며 막대사탕 초가 넘어갈 때까지 초를 불어서 꺼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아침부터 비가 부슬부슬 내려 친구와 만날 시간이 한 시간도 더 늦어졌지만, 방명록을 쓰면서 남서쪽 게스트하우스에서의 4일을 소중하게 마무리할 수 있었던 너무나 따뜻했던 생일 아침입니다. 부모님께서 걱정하지 않도록 타지에서 먹은 미역국을 사진으로 찍어 보내드렸더니 안심하셔서 더 다행이었습니다.
비바람에 송악산 둘레길을 걷는 지랄 맞은 나란 사람
낮에 비바람이 몰아쳐서 어디를 다닐 수 없는 날씨 었는데, 그 비바람을 친구와 함께 우비를 입고 송악산 둘레길을 걸었습니다. 언제 다시 올지 기약이 없기 때문에 놓치고 싶지 않아서 강행군을 했는데 힘들긴 힘들었습니다. 비바람 때문에 사진을 한 장도 남기지 못한 것도 아쉬웠습니다. 이렇게 험상궂은 날씨에 놓치기 싫다며 산행을 감행한 제 자신이 '참.... 지랄 맞다.'라고 생각한 날입니다. 더군다나 생일이라고 제가 하고 싶은 것 다 하게 해 준다는 친구는 무슨 죄인지... 그 마음에 찐으로 감동한 날이기도 합니다.
비가 그친 차나무 사이를 산책한다는 것
오후에는 예약해둔 다원 오르티스(Orteas)로 가서 티클래스를 들었습니다. 신기하게도 티클래스가 끝날 때쯤 비가 멈추고 차밭을 산책할 수 있었습니다. 수분을 잔뜩 머금은 차밭은 평화롭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났습니다. 검은 오름을 배경으로 물안개가 자욱하고, 다양한 종류의 찻잎이 심어져 있어서 그런지 여러 가지 녹색을 품을 차나무에서는 좋은 향기가 가득했습니다. 그 차나무들 사이로 걸었던 산책길을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행복한 것들로 마무리하는 생일 밤
모든 일정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왔습니다. 오랜만에 다인실이 아닌 숙소에는 TV가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따뜻한 물에 샤워하며 하루 동안 지친 몸을 풀었습니다. 땅콩과 마른오징어를 안주로 편의점표 제주 에일맥주를 마시며 TV로 좋아하는 <코미디 빅리그>와 <나 혼자 산다>를 봅니다. 생일 밤이 이렇게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좋아하는 제주에서 검푸른 자연을 제약 없이 마음껏 즐기고 좋아하는 제주 편의점 맥주를 한 캔 딱 마셨는데, '이것이 행복이구나.'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