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3주 살기
퀘렌시아
스트레스와 피로를 풀며 안정을 취할 수 있는 공간.
또는 그러한 공간을 찾는 경향
뚜벅이 여행을 하다 보면 소소하게 만나는 자연에 큰 기쁨을 느끼지만 그만큼 금세 피로가 찾아옵니다. 그때도 이 죽일 놈의 성격상 아무 데서나 쉬지를 못합니다. 월정리에서 한동리에 위치한 지인 추천 맛집을 지도로 찍고 약 한 시간쯤 걸었을 때, 핸드폰 배터리가 다해 허망하게 전원이 꺼져버렸습니다. 핸드폰의 GPS와 지도 앱만 있으면 어디든 찾아갈 수 있었던 자신감이 함께 방전되었습니다. 분명 목적지가 코앞에 있는데 찾을 수가 없어서 혹시나 하고 걷다가 해변가 마을 어귀로 들어섭니다.
개인 큐레이팅 서점과 카페의 복합 공간 <달. 책. 빵>을 만나다 @ 한동리
왠지 신기하지만 뭘까 생각해보게 되는 표지를 발견합니다. '달. 책. 빵. 저건 뭐지?' 하는 마음으로 들어가 봅니다. 기분 좋은 빵 굽는 냄새가 나는 곳. 안으로 들어가니 제 마음에 꼭 드는 곳임을 직감합니다. 내부로 들어갈수록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 비밀의 장소. 저만의 퀘렌시아를 발견한 듯합니다. 빵 굽는 소리와 밝은 채광 그리고 바람에 이끌려서 들어선 후, 제일 먼저 글을 쓸 수 있는 창가 앞의 책상 자리에 제 공간을 맡아둡니다.
더 깊이 들어가면 개인 큐레이팅 서점입니다. '아 그래서 '책. 빵'이라는 표시가 되어 있었구나~' 작명 센스에 다시 한번 무릎을 칩니다. 서점과 카페의 결합 장소인데, 카페 공간 내부도 아주 다양한 느낌으로 꾸며져 있어, 앉는 공간마다 새로운 느낌입니다. 해변을 바라보는 창가 앞은 오래도록 연인들의 차지가 되었습니다.
여행의 참된 기쁨은 계획하지 않은 우연이 주는 선물 같은 퀘렌시아를 발견할 때입니다. 오랜 걷기로 지쳤을 때, 만난 이 책방에서 복잡한 서울의 어떤 서점이나 카페에서도 느끼지 못한 신비한 보물상자 같은 기쁨을 느꼈습니다.
힐링의 모든 것, 푸른 식물 옆에서 술을 마시다. <술의 식물원> @송당리
잊지 못할 또 하나의 보물상자는 송당리 마을을 걸을 때였습니다. 송당 별장지기의 추천으로 <우연히, 그곳>이란 카페에서 사장님과 이야기를 나누다 추천받은 곳입니다. <우연히, 그곳>의 카페 감성이 너무 멋져 감탄을 금치 못했더니, 사장님이 "혹시 낮술 좋아해요? 여행하다 보면 그러고 싶기도 하잖아요~" 아주 확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저에게 추천해주신 곳이 <술의 식물원>이었습니다.
이름부터 마음에 들었는데, 들어가자마자 이거 완전 내 취향이다라는 것을 직감했습니다. 신기한 건 이 제주도에서 만나는 많은 퀘렌시아가 겉보기에는 그다지 화려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또한 참 맘에 듭니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신비한 매력을 보여주는 곳. 이곳도 카페의 방마다 공간마다 각각의 테마가 있었습니다. 통일되는 분위기는 편안함과 자연친화적이라는 것. 나무 지붕까지 밑에서 올려다보고 있으면, 시멘트 건물에서 내가 얼마나 답답했었는지, 이 모든 자연친화적 재료로 지어진 공간이 감사하게 느껴집니다.
바위에서 물이 나오는 곳 <엉물> @종달리
버스를 타고 종달리에 도착해 내린 순간 보였던 것은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신나게 축구를 하는 학생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 풍경이 너무 정감 있고 평화로운 가운데 활기차서 정말 내가 이곳에 오길 잘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문득 어릴 적 아빠와 함께 갔던 아빠의 고향, 할머니 댁 마을 어귀에 있었던 아빠가 졸업한 초등학교가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이 여행 중에 떠오르는 부모님 얼굴. 걷고 걸을 때 부모님 생각이 참 많이 났습니다. 부모님과 함께하던 어린 시절 추억이 하나둘씩 떠오를 때 그립고 또 안타깝습니다. 세월이 너무 많이 흘러버린 것이...
원 없이 가고 싶은 곳은 다 가보자는 생각으로 이 종달리에 와서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엉물이란 카페입니다. 이곳도 송당 별장지기 추천으로 왔는데, 만난 순간, '아, 내 취향저격!' 내적 감탄을 내뱉습니다. 자연과 맡닿아있는 루프탑과 야외 테라스 공간에 한번 감탄하고 내부로 들어갔습니다. 내부는 얼마나 빈티지하면서도 고풍스러운지 사장님의 안목에 감탄합니다. 역시나 테이블마다 개성이 다른 게 특색입니다.
역시나 당근케이크를 시켰는데, 며칠 전 먹은 월정리 <구좌상회>의 담백한 당근케이크와는 또 다른 맛입니다. 간간히 씹히는 열매가 색다른 맛을 주었는데 '유자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이곳은 꼭 다시 한번 들러보고 싶어서 기회가 된다면 사장님께 여쭤볼 계획입니다. 카페를 나와 마을을 걸어서 구경합니다. 이 마을이 참 마음에 듭니다.
'SLOW'가 곳곳에 묻어 있는 종달리 곳곳. 이곳은 사랑이어라
걷다가 발견한 옛 게스트하우스의 흔적이 보입니다. <수상한 소금밭>이었습니다. 이 곳도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 한번 구경이나 해보자는 생각으로 다가갑니다. 아쉽게도 공사 중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바닥에서 발견한 글귀가 제 마음을 후려치고 갑니다.
하지 않을 수 있는 힘
머뭇거리는 능력
깊은 심심함
이것이야말로 제주도에서 내가 추구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유쾌하게 발걸음을 돌립니다. 그리고 중얼거립니다. '하지 않을 수 있는 힘, 머뭇거리는 능력, 깊은 심심함... 나에게 없는 것들... 그리고 잘 해낼지 도무지 자신이 없는 것들...'이란 생각을 하며, 다시 한번 이곳 제주에 머무는 동안 저 말들을 실천해보자고 다짐을 합니다. 아마 그 다짐은 지키기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갔다가 또 만난 곳은 <소심한 책방>이라는 곳이었습니다. 생각보다 너무 멋진 풍경에 놀라 서다가 갔는데 문이 닫혀 있었습니다. 역시 제주도는 인스타나 전화로 휴무일을 미리 확인해야 된다는 것을 새삼 느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것도 참 일이다...' 싶어서 다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제주도의 미션을 떠올리며 '이 또한 종달리에 다시 오라는 이유구나.'라고 여유롭게 생각하고 넘어갔습니다.
종일 걸은 오늘은 처음으로 제주도에서 산 천혜향으로 비타민을 보충해봅니다.
제주.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