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6시에 일어나 긴 머리를 감고 말리고, 옷을 챙겨 입고, 분주하게 화장을 하고 7시 셔틀버스를 타러 발걸음을 재촉한다. 한겨울, 차가운 새벽 공기를 가르며 깜깜한 골목을 걷는 발길을 재촉할 때면, 국민학교 때부터 살아온 동네 건만 온통 낯설게 느껴진다.
그렇게 매일을 같은 건물로 출근해 8년을 꼬박 일했을 때, 정신적으로 지침을 느꼈다. '쉬고 싶다. 푹 쉬고 싶다.' 나의 마음을 늘 이야기했다. TV를 꺼 뉴스를 보지 않고, 라디오를 듣지 않았다. TV 속 뉴스와 라디오의 이야기들이 소음으로 느껴지고, 그 소음이 나를 힘들게 했다. 돌이켜보니 그때는 그토록 내가 예민했다.
집을 나와서 회사 근처 오피스텔로 옮겼다. 나만의 쉴 곳이 필요하다고 절실히 느꼈다. 자그마한 오피스텔의 방에는 침대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세상의 소식을 전하는 모든 것을 차단하고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그저 쉬었다. 일하는 나를 좋아했기에 일을 포기하겠다는 생각은 한 적이 없다. 다만 그 일을 하는 과정에서 사람과의 부대낌이 힘들었다.
독립도 하고 힘들었던 팀에서 벗어나 새로운 팀으로 이동도 했는데 새로운 업무에 적응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8년 차인데 이것밖에 못하냐며 상사는 노골적으로 나를 무시하는 듯했다. ‘그 정도 경력이면 이미 이런 것쯤은 알고 있어야 하지 않느냐?’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공격하는 것 같았다.
어느 날 아침 출근을 해야 하는데, 침대에서 몸이 일으켜지지 않았다. 그냥 그대로 눈을 감아버렸다. 억지로라도 몸을 일으켜 출근하던 평소와는 달리 처음으로 상사에게 겨우 전화를 걸어 아파서 출근을 못하겠다고 말했다.
밤이 될 때까지 침대에 그대로 누워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해가 질 무렵에야 친구에게 카톡으로 이 상황을 이야기하니, 우울증인 것 같다고 상담을 받고 우울증 약을 먹어보라고 했다. 지금은 공황장애나 우울증이 감기와 같은 치료 가능한 질병으로 알려졌지만, 당시에는 정신과 약을 먹는 것, 정신과 상담을 받는 일'이 주홍글씨가 박히는 큰일처럼 여겨졌다.
병원에 가기 두려운 마음에 차선책으로 '회사 내 상담실'을 찾았다. 상담사께 내가 겪은 무력감을 이야기하고 우울증 약을 처방받는 것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문의했다. 그녀는 우울증 약을 먹는 게 크게 나쁜 것이 아니고, 한번 상담을 받아보라고 차분하게 말씀해주었다.
내 증상과 걱정을 말했을 뿐인데, 상담실을 문을 열고 나오며 마음이 정리가 됨을 느꼈다. 굳이 병원에 가고, 약을 먹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그리고는 진짜 약보다 내 삶에 약효를 주는 '내 마음을 기쁘게 해주는 것'을 찾아보기로 했다.
먼저 네일아트 학원에 등록을 하고, 주말과 평일 퇴근 후에 국가공인자격증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회사를 다니며 자격증을 준비하는 게 힘드냐고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혹시 회사에서 더 버티기 힘들어 그만두기라도 해도 '내 일'을 할 수 있다는 목표가 생겼다.
네일 아트를 선택한 첫 번째 이유는 내가 네일 아트 받을 때의 마음을 살펴본 결과였다. 남들에게 이뻐 보이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나 스스로 이쁘게 꾸미며 기분전환이 되었다. 아무도 나를 소중하게 대해주지 않는 것 같을 때, 유일하게 나라도 나를 챙겨주지 않으면, 버티기 힘들다고 느낄 때, 비싼 돈을 지불하고서라고 화려한 네일 서비스를 받았었다.
두 번째로는 내가 갈망하던 마음 치유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 만약 자격증을 따면, 회사 근처에 샵을 내고 주 타깃 고객을 우리 회사 여직원들로 해야겠다고 상상을 했다. 네일아트를 해주면서, 여성으로서의 회사생활이 얼마나 쉽지 않은지 응원해주고, 힘든 일 토닥여주면서 고객관리를 한다면, 금세 단골을 확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심리 에세이 <심야 치유의 식당>에는 나와 같이 마음이 다친 현대인들의 로망의 공간이 나온다. 그곳은 바로 '노사이드'라는 심야 식당이다. 한때 정신과 의사였던 노사이드의 주인장 철주는 심야식당을 고를 때, 다음을 가장 고려했다고 한다.
대학가 뒷골목 지하에 문을 연 20평 남짓의 작은 가게 노사이드는 아는 사람만 아는 가게다. 철주가 가게를 얻기 위해 돌아다닐 때 첫 번째로 고려한 것은 마음껏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그리고 충분한 음장감을 가질 수 있는 공간이었다. (중략) 처음 들른 사람들은 테이블을 놔두고 바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사람들의 모습에 의아해하고, 테이블에 앉아 쭈뼛거리다가 나가기 일쑤다. 단골들은 이 가게가 망할까 봐 가슴 졸이지만 정작 가게 주인 철주는 태평하다. <심야 치유 식당> 하지현 저 _ page 9
몇 장을 넘기며 읽었을 때, 이 책을 읽어야만 할 장소가 바로 떠올랐다. 연희동에 위치한 '책바'이다. 책을 들고 달려가 책바에 발을 들이민 순간, 공간을 채운 책들과, 이미 한잔씩 하면서 책을 읽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왠지 모를 위로를 느꼈다.
바의 가운데 자리에 자리를 잡고 '뱅쇼'를 주문했다. 막 책에 빠져들었을 때, 스노피크 티타늄 컵에 따뜻한 레드와인이 과일을 한가득 머금고 시나몬 향을 풍기며 등장했다. 그 달달함이 좋아서 홀짝홀짝 들이켰는데, 어느새 살짝 기분이 좋은 취기가 느껴진다. 책을 읽을 때, 약간의 알코올을 기운을 빌리면, 집중력이 더 잘된다는 것을 알게 해 준 곳이다.
책 속의 주인공들은 공황장애, 애정결핍, 인정 욕구 갈망 등 다양한 어려움에 시달리고 있다. 내 삶에서 느꼈던 어려움을 그들에게서 볼 수 있어 공감이 된다. 노사이드에서 만난 사람들은 서로의 아픔을 이해하고, 공감하고, 극복하도록 곁에 있어 준다.
아픈 시간은 누구에게나 다가오지만, 그 순간들을 버틸 힘이 되는 사람들, 힘이 되는 취미, 힐링되는 공간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금 생각해본다. 한때 마음이 아픈 줄도 모르고 그저 열심히만 살아가던 나도 이제는 그 경험을 바탕으로 타인의 아픔을 들어줄 수 있는 여유와 내공이 생기지 않았나 기대해 본다.
* 이 글은 이전에 아는언니의 매거진 <심리학을 읽고 나누다>에 기재한 글을 재구성, 편집하여 올리는 글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