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오늘은 길었던 브라질 출장 마지막 날이에요. 내일이면 인천공항으로 떠나기 위한 기나긴 비행이 시작되겠죠. 저는 지금 짐 정리를 다하고 호텔에 남겨둔 것이 없는지 정리하고 잠시 침대에 누워 쉬고 있어요. 아빠가 많이 생각나고 보고 싶어 편지를 써봐요.
제가 브라질 상파울루로 출장 간다고 바쁘게 준비할 때 아빠는 저보다 더 좋아하셨어요. 아침 일찍 공항으로 출발하는 공항버스까지 손수 캐리어를 끌어 저를 배웅해주시면서 제 손을 잡고 길을 걷던 아빠의 손길이 느껴지는 듯해요.
이번 브라질 출장은 저와 팀장님 그리고 다른 팀원 2명이 함께 했어요. 브라질이 이슈가 많고 중요한 지역이라 그런지 다른 부서 사람들도 출장을 많이 와있네요. 이곳은 거의 단체생활이에요. 아침에 일어나서 호텔 조식을 먹고 법인에서 보내주는 차를 타고 함께 법인으로 이동해요. 하루 종일 업무를 보고 호텔에 돌아오면 저녁식사도 함께 먹으러 나가요.
지난 주말에는 팀장님과 팀원들과 함께 상파울루 근교에 나가서 바다도 보고 근사한 해산물 요리도 먹었답니다. 브라질은 치안이 위험해서 혼자 다니다가 자칫 강도를 당하거나 사고가 날까 봐 늘 사람들과 뭉쳐서 다녀요. 그러니까 너무 걱정은 안 하셔도 돼요.
사실 브라질 도착하고 이튿날 저녁 함께 출장 온 팀장님께 큰소리를 들었어요. 일 끝나고 호텔 밖으로 나가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7시 정시에 모이기로 했는데, 시차 적응도 그렇고, 낯선 곳에서 업무도 너무 피곤하여 10분쯤 늦게 나갔어요. 팀장님은 다른 팀 사람도 있는데 "늦게 나오면 어떻게 하냐"며 큰소리로 저에게 무안을 주시 더리고요. 그냥 곰 같은 팀장님의 우렁찬 목소리일 뿐이었지만, 단순 '지적'이라기보다 저한테 체감상으로는 '고함'에 가깝게 느껴졌어요.
아빠가 저를 키우시면서 저한테 고함 한번 친절도, 사랑의 회초리를 한번 데신 적도 없었죠. 늘 제 손을 잡고 걸어주셨고, 멀리 갈 일이 있으면 늘 그곳의 지인께 연락해서 만약을 대비해 연락할 곳이 있도록 미리 신경 써주셨어요.
물론 일이지만, 이렇게 먼 타지에서 아빠처럼 믿고 의지하는 분의 큰소리는 저를 한없이 주눅 들게 만드네요. 저는 업무상의 일정도 아니고, 주요 회의도 아니고, 출근해서 일을 다 마치고 식사 전, 방에서 치울 것도 있고 씻고 피로를 푸느라 10분 늦은 것뿐인데, 타지에서 제일 믿고 의지하는 팀장님의 불호령이 마음의 긴장을 주네요.
아빠 그런데, 한편 생각해보니 출장지에서는 안전상의 이유 및 차량 이동의 편의를 위해 모든 일정을 함께 하는 공동생활을 하게 되는데, 제가 여자라고 자꾸 뒤처지고 '예외'를 주게 되면 밉보일까 봐 일부러 더 엄하게 이야기하신 게 아닌가 싶어요. 앞으로는 해외 출장지에서는 더욱 긴장하여 흐트러짐 없이 행동하고, 특히 시간 약속은 철저히 지키는 것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을 것 같아요. 저는 놀러 온 게 아니라 일하러 온 것이니까요.
사실 늦은 것만으로 혼난 게 아니에요. 법인에 출근해서 시장 데이터 분석 자료를 다 같이 보며 경쟁사 현황을 리뷰했어요. 팀장님께서는 법인에서 직접 데이터를 받아 분석하는 것을 저에게 지시하셨어요.
그런데 미팅 후 또 바로 이동 일정이 생겨서 데이터 받은 것을 회의 후 며칠 지난 후 추가하여 상사에게 보고했어요. 팀장님은 "회의 끝난 날 바로 보고했으면 얼마냐 좋았겠냐고" 한마디 하시더라고요. 저는 데이터를 받고 제대로 분석할 시간이 없었고, 제대로 분석하지 않은 상태에서 보고하다 실수가 생길까 봐 좀 더 시간을 들여 꼼꼼히 분석 후 서면보고를 한 것인데 상사가 보는 관점은 달랐던 거예요.
이번 출장으로 저는 배운 게 참 많아요. 함께 일하는 상사의 의중 파악이 얼마나 중요한지 실감한 거죠. 업무에 있어서는 꼼꼼함과 상세함도 중요하지만 시의적절성, 타이밍, 즉 완벽하지 않아도 빠른 결과물을 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온몸으로 배웠어요. 완벽하지 않아도 빠른 중간보고가 상사의 피드백을 받아 완벽을 향해 나아간다는 것을 경험으로 배우고 있어요.
아마 아빠께는 팀장님께 혼나고 혼자 울던 이야기는 절대 이야기하지 못할 것 같아요. 아마 저는 제가 혼나고 운 것은 마음속 깊이 넣어두고, 제가 얼마나 많이 일을 배웠는지, 다시 브라질에 가게 되어 얼마나 좋았는지를 재잘재잘 떠들어대겠죠.
그러면 아빠는 눈을 반짝이며 제 이야기를 들어주실 거예요. 보지 않아도 보이는 것 같아요. 아참,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팀장님이 무섭기만 한 분은 아닌 것 같아요. 출장 마지막 날 법인 근처 쇼핑몰에 잠깐 가시더라고요. 필요한 게 구두인지 신발가게를 가시는데 저를 데려가셨어요. 저의 통역이 필요한가 싶어서 가만히 들어봤는데, 스페인어를 잘하셔서 그런지 점원에게 알아서 가격도 잘 물어보시더라고요.
아빠! 저 많이 컸죠? 사회에서 이렇게 경험하고 배워갈수록 아빠 생각이 많이 나요.
아빠가 얼마나 저를 애지중지 곱게 키워주셨는지 감사하고, 또 아빠가 직장에서 가족들을 위해 이런 눈물의 순간을 넘기며 보내셨을 시간들이 어렴풋이 느껴져서 더욱 생각나요.
상파울루에서 인천까지 비행은 20시간이 넘어서 아마 이제부터 긴 여행이 될 것에요.
곧 만나요, 아빠, 사랑해요.
2012년. 브라질 상파울루에서 출장 마지막 날
아빠가 너무 그리운 K-장녀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