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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는언니 Oct 24. 2021

네가 이 글을 절대 읽지 않기를 바라며 쓰는 편지

잘 지내니? 네가 중남미 주재원 나간지도 5년은   같아. 처음 해외 발령으로 인사 왔을 , '네가 한국에 돌아올 때쯤에 내가 과연 회사를 계속 다니고 있을까?' 잠시 생각했었어. 그런데 여전히 이렇게 나는 이곳 본사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구나.


우리 아마 꽤 오랜 인연이지? 대학교 같은 과 선후배로 알게 되었고, 학창 시절엔 그다지 친하게 지낼 기회는 없었어. 내가 우리 회사 해외마케팅 중남미 영업사원으로 입사해서 한창 눈물 콧물 흘리며 회사 다닐 때 너에게 처음으로 연락을 했어. 당시 나의 팀장님이 포르투갈어 잘하는 후배를 추천해달라고 하셨고 너를 팀장께 내가 직접 추천했지.


브라질 교포인 데다가 대학에서 포르투갈어를 전공한 너인 만큼 면접 후 바로 뽑혀서 나와 같은 팀에서 만났을 때 참 신기하더라. 무엇보다 너는 이전에 알던 것과 꽤 다른 모습이었어. 내가 직속 선배이기도 하고, 내가 너를 추천한 덕에 입사해서인지 나에게 최선을 다해서 잘해주는 걸 느꼈어.


사실 나는 너에게 선입견이 있었어. 교포라고 하면 외국어는 잘할지 모르지만, 왠지 철없고 한국문화에 적응을 못하는 친구들을 많이 봤었거든. 그런데 너는 참 싹싹하고 눈치 빠르게 네 일을 잘 해내고 나를 살갑게 챙겨주더라.


사실 그 당시 나는 회사 입사한 지 한 3년 정도 됐을 때고, 보수적인 회사 분위기며, 힘든 업무에 많이 삐뚤어져있었어. 그리고 뭐랄까, 선배는 후배에게 깐깐하고 까칠해도 된다는 잘못된 생각이 있었던 시기였거든. 그런 까칠한 나에게 너는 참 살갑게 굴더라. 네가 메일 나에게 메신저로 말을 걸어주어 내 기분을 살필 때, 나는 안정감을 느끼고 회사에 친구라고 느끼는 의지할 사람이 있어서 힘이 됐었어.


기억나니? 네가 자기를 입사시켜준   덕분이라며 좋은 레스토랑에 데려가 크게 한턱  . 기분 좋다고 와인을 마시다가 꽐라가 되어 서로 놀리고 장난쳤었잖아. 어느 날은 우리 둘이 같이 점심을 먹는데 반찬으로 꽁치가 나왔는데, 네가 꽁치의 뼈를 슥슥 발라주더니 먹으라고 하는데 심장이  떨어지는  알았어. 내가 오랜 해외출장을 가서 시차 적응이며 업무에 허덕일 , 힘들지 않냐고 안부 문자를 보내는 유일한 팀원도 너였어. 한날은  차를 뽑았다며 나를 집에 데려다주고 쿨하게 가는 모습이  어른 같더라.


나도 네가 브라질로  출장을  ,  다녀오라고 비행기에서 먹을 간식도 챙겨주었지. 그리고  때문에 바빠서 네가 점심을  먹을 , 주전부리를 사다 주기도 했고. 이런 자잘한 추억들이 가끔은 선후배 간의 우정인지 썸인지 헷갈릴 때도 있었지만, 네게는 여자 친구가 있었으니, 그냥 사회생활을 아주 잘하는 후배라고 생각하는  마음이 편했어.




그러던 어느 날  우리 조직이 없어지고, 우리 팀이 큰 조직으로 통합되었지. 새 조직의 팀장님은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지셨으나 급한 성격과 불같은 열정으로 내가 감당하기 어려울 때가 많았어. 그래서 새로운 팀에서 나는 늘 힘들었어. 그 해를 잘 넘겨야 대리로 진급할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를 꽉 물고 버텼지만, 내가 왜 이렇게 힘들고 외롭게 버티는지 눈물이 날 때가 많았어. 그 모습을 보던 네가 어느 날 '저한테 늘 힘이 돼주던 누나가 이렇게 힘들어하니까 마음이 안 좋네요...'라며 위로해주었지.


반면 너는 새로운 팀이 나만큼 힘들어 보이지는 않더라. 오히려 점점 날개를 달고 훨훨 날아가는 것 같았어. 새팀에는 너를 이끌어주는 형 (남자 선후배는 서로를 형 동생이라고 부르며 엄청 끈끈해 보이는)들이 많아 보이더라. 너는 '형'이라고 부르며 따를 수 있는 선배들을 나는 '오빠'라고 부를 수 없었고, 시커먼 남자들 무리에서 나만 홀로 하루하루를 외롭게 버티는 외톨이 같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어. 네가 형들과 친해지면서 나에게 메신저를 보내던 횟수도 현저히 줄어들었지. 너는 늘 일로 바빴고, 형들도 챙겨야 하고, 새로운 팀장님도 맞춰줘야 하고... 아마 내가 잘 보이지 않았던 것 같아.


그해에 브라질 바이어들이 방문하는 행사에서 나는 전체 일정을 조율하는 일을 담당했고, 브라질 교포인 너는 신제품 소개를 하는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지. 네가 하는 신제품 소개는 제품의 기능을 제대로 알고 바이어에게 소개하는 것으로, '핵심업무'라 생각이 들었어. 네가 브라질어에 능숙한 교포인 만큼 그 일을 네가 하는 게 맞다고 이성적으로는 생각했어. 그런데 나는 정작 핵심업무가 아닌 뒤치다꺼리하는 일이나 맡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네가 점점 미워지고 나는 그런 서운한 마음을 솔직히 표현하지도 못한 채 너에게 마음의 문을 닫아버렸어. '나도 포르투갈어로 말할 줄 아는데, 나도 미리 프레젠테이션 대본을 다 쓰고 달달달 외워서 그들 앞에서 제품 소개를 할 수 있을 텐데... 네가 없었다면, 그 역할은 내가 했을 텐데...' 나는 마음속으로 한껏 너를 질투하고 있었어.


그렇게 너와 점점 멀어졌지. 마음으로 점점 멀어졌고, 내가 팀을 옮기면서 그 이후로 따로 만난 일이 없었고, 서로의 인생을 살기 바빴을 거야. 그러던 네가 정말 오랜만에 찾아와 청첩장을 주었지. 그리고 해외 주재원으로 나간다고 했어. 그때 이후로 다시 볼 일도 없을 것 같고, 또 좋았던 기억은 생각날 일이 더 없을 것 같았지만, 끝내 그 말을 못 했어.


한때 너 덕분에 회사를 버티던 시간이 있었다고.

하지만, 너를 면접 보도록 팀장에게 소개한 나를 미워한 적도 있었다고.

내가 소개하지 않았어도 실력 있는 너는 어디에서든 잘됐겠지만,

내가 있어야 할 자리를 너한테 빼앗긴 것 같은 생각이 들어 한동안 힘들었다고.  


2021. 10월 와인 한잔 마시고 싶은 밤.

내가 추천한 후배한테 밀려서 속상했던 선배가. (ft. 그래도 그때가 그리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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