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차 회사원 '아는언니'의 세 번째 딴짓일지
당신이 무대 위의 연기자고, 배역을 선택할 수 있다면
어떤 배역을 맡아보고 싶나요?
저는 처음엔 '사랑받는 여주인공'이었습니다. 한 명도 아닌 여러 명의 남자에게 동시에 사랑을 받는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연기수업을 받는데 지도 선생님이 어떤 역할을 하고 싶은지 생각해보라는 과제를 내주었을 때, 제가 써낸 희망사항은 이것이었습니다. '이 구역의 미친년은 나'를 외치는 드라마 <시크릿 가든>의 김사랑이 맡았던 역할, 즉 자기표현에 당당하고 솔직한 캐릭터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제 안의 꿈틀거리는 욕망은 틀에 박힌 '이쁘니 공주' 역할은 온전히 만족을 주지 못한 것 같습니다. 당당하고 솔직하거나 더해서 '못돼 쳐 먹은 악녀'가 하고 싶었습니다.
그때 즈음에 연기 수업에서는 '즉흥연기'라는 걸 했는데, '상황'과 '목적'만 설정하고 나머지는 배우들이 알아서 상황을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상황은 '차를 타고 교외로 놀러 간다' 목적은 '함께 가는 그 사람을 좋아하기 때문에 고백을 한다'라고 설정해둡니다. 그러면, 무대 위에서 어떻게 교외로 놀러 가자고 말을 할지, 약속은 어떻게 잡을지, 만나서 어떤 말을 할지, 가는 길에 분위기를 어떻게 만들지, 고백을 어떻게 위트 있게 할지 모든 구체적인 행동을 즉흥 연기로 해내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자기 자신이 평소에 생각하던 상황이 나오겠죠. 그러면 결국은 연기를 통해 자신을 보여주는 것이고, 그렇게 즉흥연기를 하고 나면 나를 보여줬으니 그렇게 후련할 수가 없었습니다. 더해서 내가 평소에 용기가 없어 주저하며 하지 못했던 것을 연기로나마 해내면 대리만족이 되어 아드레날린이 솟구쳤습니다. 당시 저는 이 연기 수업을 '힐링캠프'처럼 생각하고 했습니다.
연기 수업을 들으며 나를 돌아보고, 나를 표현할 수 있었기에 저는 그 시간들이 참 좋았습니다. 이어 행운스럽게도 저는 직장인 뮤지컬 동호회의 연말 공연에서 <헤어스프레이>의 악녀 '벨마'를 연기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1960년대 미국 볼티모어. 십 대들에게 최고의 인기를 끌고 있는 코니 콜린스 쇼의 댄싱 퀸을 뽑은 미스 헤어스프레이에 참여하고 싶은 키가 작고 뚱뚱한 트레이시. 코니 콜린쇼의 방송 매니저이자 미스 볼티모어 출신인 금발의 미녀 아줌마 벨마는 자기 딸 엠버 같은 날씬한 금발 미녀가 미스 헤어스프레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미모가 능력이고 백인이 우월하다고 주장한다. 긍정적이고 열정이 넘치는 트레이시는 후진 없는 캐릭터로 저러거나 말거나 즐겁게 춤을 추는 데에는 춤을 즐기고 잘 추는 흑인들도 함께 추기를 원하고, 또 1달에 1번 자선 행사하듯 주어지는 흑인들의 날(Nigro Day)이 매일같이 있기를 바라고, 흑인들이 차별받는 것이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헤어스프레이> 내용 요약
벨마가 극 중 하는 일이라고는 딸 엠버를 혼내면서 꼭 '퀸'이 되라고 다그치고, 뚱뚱한 트레이시를 구박하고 거만하고 도도하게 모두를 쳐다보면서 '내가 최고'라고 뽐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재즈풍의 솔로곡을 멋들어지게 부르면서 자신이 어떻게 그 미인(댄스) 대회에서 우승할 수 있었는지 말하며 한껏 자아도취에 빠지는 신입니다.
이 역할의 오디션은 사람들이 지원하지 않았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너무 캐릭터가 세고 강렬하기 때문에 선뜻 지원하기에는 기에 눌린 거죠. 저 또한 그 역할에 처음부터 지원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이전에 연기수업을 들을 때, 막연하게 생각했던 악녀 역할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했기에, 오디션 지원서에 최애 역할은 사랑스러운 '나난'이지만, 혹시 만약 모든 역할이 다 떨어지면 악녀를 맡아보고 싶다고 간단하게 썼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연출은 저에게 벨마라는 악녀를 연기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이전 글에서 워낙 제가 '나난'을 위해 신경을 썼기 때문에 사실 벨마는 그 정도까지 심도 있게 분석하고 준비에 몰입하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유튜브로 영화에서의 벨 마신을 찾아보면서 나만의 벨마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계속 생각했습니다.
연습할 때 연출에게 들었던 말은 늘 '더 도도하게, 더 깔보듯이'였습니다. 제가 아무리 해봤자, 그렇게 악랄하게는 못했던 거죠. 하지만 공연하는 사람들 사이에 하는 말이, '어떻게든 공연은 성사된다'는 것입니다. 마법같이 무대에 올라가면 달라진다는 뜻이기도 하죠. 공연 날자가 다가오면 어떻게든 캐릭터에 맞춰 표현하고, 배우는 그 배역 자체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벨마라는 악역은 외모가 변신하면서 더욱 강렬하게 와 닿았습니다. 우선 벨마가 입을 옷과 소품들을 계속 찾아 헤맸습니다. 집에 가지고 있던 옷으로는 영 커버가 안되어, 동묘시장 등 재래시장을 찾아가 온 가게를 뒤집으며 어울리는 옷을 찾고, 그래도 없으면 동대문 시장 사이사이를 헤맸습니다. 가성비 있는 옷이 없으면 인터넷 쇼핑으로 샅샅이 뒤졌습니다. 그리고 옷만으로 이 센 캐릭터를 표현하기 어림없다 싶어, 모자, 액세서리 등을 찾았고, 개성 있는 옷을 가지고 있는 친구에게 모피까지 빌려서 겨우 소품을 갖춰갔습니다.
이렇게 해서 몸매가 드러나는 벨벳 소재의 푸른 드레스와 모피 코트, 그리고 수작업으로 만든 머리띠까지 더해져 악역 벨마를 온몸으로 표현하는 벨마의 콘셉트가 완성되었습니다. 개별 신을 연습할 때는 윤곽이 드러나지 않아 몰랐지만, 다 같이 모여 의상을 입고 리허설을 진행하고부터는 화려한 의상과 액세서리를 하고, 거침없이 독설을 내뱉고, 재즈풍의 매혹적인 노래를 부르는 벨마역을 모두들 부러워하는 눈치였습니다. 누구도 감히 원하지 않았던 역할이 누구나 탐낼만한 역할로 탈바꿈되는 순간이었습니다.
물론 악역이 주는 매력에 도취되어 있지 않도록 단체 행동에서는 배려심 있는 '사람 냄새나는 배우'가 되도록 신경 썼습니다. 단체 군무 이후에 벨마가 등장하기에 여러 배우들과 호흡을 맞추기 위해 계속 연습했습니다. 한 명이 빠지면 전체 연습이 진행되지 않기 때문에 서로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 배려하는 것은 기본이었습니다. 회사원들이 일을 끝내고 개인 시간을 할애하여 연습하는 만큼 허투루 시간을 보내지 않고, 연습 막바지로 갈수록 예민해지는 상대에게 혹여 상처를 줄까 다들 조심했던 것도 잊지 못할 기억입니다.
개인적으로는 화려한 의상의 '벨마'를 마치고 다음 극의 '나난'으로 변실 할 때 엄청나게 빠르고 집중력 있게 의상을 바꿔 입고 화장을 고쳤던 것이 기억에 남습니다. 처음 '드레스 리허설'을 할 때는 옷 갈아입을 시간이 여의치 못할까 봐 그야말로 탈의실에서 긴장해서 옷을 갈아입는데 손이 덜덜 떨려 단추를 풀지도 못할 지경이었습니다. 가뜩이나 벨마의 센 캐릭터를 표현하느라 연기가 끝나면 오히려 덜덜덜 떨리는데, 탈의실에 가면 긴장이 풀리고, 아니 또다시 다른 역할로 변신해야 하는 긴장의 연속이 부담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역시나 연습은 실전을 강하게 만들었습니다. 혼자 탈의와 분장을 해내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주변 지인에게 미리 도와줄 수 있도록 도움을 청해 두고, 공연 당일에는 실제 메이컵 스태프가 전문적으로 도와주어 배우는 연기에만 집중하게끔 상황을 다 같이 만들어가고 있었습니다. 모두가 공연의 성공을 위해 한마음 한뜻으로 집중하고 있었고, 저는 제 배역을 잘 연기해내서 누가 되고 싶지 않았고, 빛을 내고 싶었습니다.
아직도 기억에 남는 것은 벨마가 한껏 취해서 노래를 부른 후, 퇴장하는 장면인데요, 제 옆의 두 남자 배우들이 제 팔을 잡고 저를 들어 올려 공중에 띄웠다 가 내리는 동작입니다. 저는 마녀처럼 '으하하하하~'하고 웃음소리로 무대를 채워야 하고요. 그런데 계속 남자 배우들이 저를 들지 못하는 것입니다. 나중에 들었는데, 제가 안 들려서 자기들끼리도 엄청 고민을 했다고 하더라고요. 이것도 노하우가 있어서 저는 반동을 주며 위로 튀어 오르고, 제 팔을 그들이 지탱할 수 있도록 힘주어 밑으로 내려야 힘의 균형이 맞아 저를 들어 올릴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노하우를 깨닫기 전에는 힘주면 무거워질까 봐 팔의 힘까지 빼버려서 저를 들 수 없었던 것이고요. (지금도 저를 온몸으로 들었던 친구들은 절친으로 남아있습니다.)
공연이 이루어지는 무대 뒤의 대기실에서도 마이크를 찬 배우들은 긴장을 늦출 수 없습니다. 자칫 자신이 나오지 않는 시간이라고 떠들다가는 마이크에서 소음이 세어나가 관객들한테 들릴 수도 있고 그러면 사고가 되는 것이죠. 벨마로 등장해 평소의 제가 아닌 온몸으로 매력을 뿜어내는 밸마를 연기하고 백스테이지로 돌아갔을 때, 동료 배우들이 조용히 엄지를 치켜들며 잘했다고 격려해주던 순간은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무대를 서기 위해서 보낸 인고의 시간, 무대 위에서 빛나던 순간, 백스테이지로 돌아와서까지 모든 순간은 빛나고 아름다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