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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는언니 Oct 14. 2020

언제, 어디서, 어떻게 다시 만날지 아무도 모르는 일

10년 차 회사원 '아는언니'의 다섯 번째 업무일지

해외 마케팅 업무에서 연중 가장 큰 행사 중에 하나는 빅바이어(구매자)의 한국 방문입니다. 그들이 우리 제품을 얼마나 많이 살 것인지 확인하고, 지속적인 파트너십을 유지하기 위해 자사의 브랜드 가치를 보여주는 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보통 바이어들이 비슷한 시기에 한국을 방문하고, 한국만 방문하는 것이 아니라 아시아의 여러 경쟁업체까지 두루 둘러보곤 합니다. 그래서 이 행사가 있을 때는 온 팀원들이 총력을 기울여 맞이할 준비 합니다. 업무는 바이어 방문 일정 잡는 것부터 시작하게 됩니다. 이후 신제품 소개, 비즈니스 미팅 어레인지, 한국에 머무는 동안의 일정(업무 일정뿐 아니라 필요시 관광까지) 등을 관리합니다.


그러면 이렇게 중요한 바이어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가장 신경 써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아마도 제일 손이 많이 가는 일정관리가 아닐까 싶습니다. 한번 정한 일정을 딱 fix 하고 바꾸지 않으면 얼마나 좋을까만은 그렇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당시 제가 일정관리를 하는 일을 담당하게 됩니다. 머무는 동안의 일정을 시간 단위로 거래처별로 표기하며, 주요 임원의 일정을 고려하여 주요 회의 등 일정을 만들어 갑니다. 시시각각 사정에 따라 바뀌는 일정을 정리해서 전 관련자에게 공유하자니, 어째 제가 여행사 직원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남들이 볼 땐 그 일이 대수냐 할 수도 있지만, 담당자로서 혹여 잘못 정리해서 미스커뮤니케이션이라도 날까 봐 (불타는) 금요일 밤까지 전층에서 저 혼자 남아서 엑셀 정리하고 메일을 보내던 시절입니다.


드디어 바이어가 한국에 도착하고 일정이 시작됩니다. 보고받는 사람에 따라 스케줄을 별도 정리하는 것도 저의 일입니다. 담당님, 사업부장님, 본부장님의 스케줄이 다 다르기에 바이 에어 맞춰 그들의 스케줄을 따로 정리합니다. 그리고 주요 행사 시에 케이터링 준비도 합니다. 이 당시에 커피를 스타벅스에서 특별히 준비했는데, 나중에 센스 있었다고 칭찬받기도 했습니다.


혹여나 바이어들이 불편함이 있을까 이동시 브라질어(포르투갈어)를 할 수 있는 저와 몇몇 후배들이 늘 바이어와 동석하여 함께 이동했는데,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주요 거래선 중 한 분을 픽업하는 날이었습니다. 신라호텔로 사장님을 픽업하러 갔는데 예상외로 여자 사장님이었습니다. 회의장소로 이동하는데 스타벅스에 잠깐 들려 커피 한잔 테이크 아웃해가자는 것입니다. 그분은 외모도 성격도 참 소탈했고 늘 남자 사장님만 보다가 여자 사장님인 것이 은근히 반가웠는지 저 또한 그녀를 편하게 대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어떤 바이어는 후계자인 아들과 동행했는데 그는 자신이 미래의 핵심 파워라는 것을 아는지 엄청 까탈스럽고 변덕스럽게 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모든 업무 일정이 끝나고 한국의 관광지를 데려다 주기로 했는데, 갑작스레 장소변경을 요구해서 모두들 곤란했던 기억도 있습니다. 이렇게 바이어들이 오면 혹시나 그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일 없을까 노심초사하며 의전에 만전을 기하곤 합니다.


드디어 마지막 날이 되었고, 제가 지시받은 업무는 '바이아의 집' 담당자들을 공항에 무사히 배웅하는 일이었습니다. 이전 입사 면접 글에서 보셨다면 아시겠지만, 저는 브라질 최대 유통인 '바이아의 집'을 안 것으로 입사의 문턱을 넘은 행운아가 됐다고 생각하기에, 그들은 저를 몰라도, 저는 그들이 그저 반가우며 심지어 고마운 마음까지 가지고 있었습니다. 벤에 그들을 태워 공항까지 갔고 그중 구매 담당자가 감기 기운이 있는지 약을 사고 싶다고 해서 약국에 데리고 갔습니다. 그가 저한테 직접 혜택을 준 것은 없지만, 그저 고마운 마음과 향후 비즈니스가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 그리고 한국과 우리 회사에 대해 좋은 기억을 가지고 갔으면 하는 바람으로 비타민 음료를 사서 헤어질 때 주었습니다. 브라질로 돌아가는 비행시간이 긴 만큼 편안하게 가라고 인사하며 배웅하였습니다.


그렇게 바이어 방문 덕분에 평소에는 가보지 못할 비싼 레스토랑도 가봤고, 신제품도 제일 먼저 보고, 한국에서 포르투갈어도 해보고 의미 있는 일로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이와는 별도로, 그해에 저는 회사에서의 커리어에 큰 전환점을 맞게 됩니다. 다음 해 초에 브라질 해외영업을 팀을 마무리하고 다른 직무로 이동한 것입니다. 이후 한 2년쯤 흘렀을까요? 회사에서 미팅룸 사이 복도를 지나는데 외국인이 많이 다니는 겁니다. 그맘때는 늘 바이어의 본사 방문이 잦은 시기입니다. 제 특별한 특징 중 하나가 어디에서든 포르투갈어 말소리는 귀신같이 찾아 듣는다는 것입니다. 그날 복도를 걷는데 포르투갈어 대화 소리가 들리는 겁니다. 시선을 쫒은 끝에 왠지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이 있는데 정확히 누구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당신은 지난번 내가 한국 왔을 때
공항까지 배웅해준 분이죠?

그가 저를 보고 말을 겁니다. 바로 '바이아의 집' 구매담당자였던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서로 짧은 안부인사를 건넸습니다. 그때 새로운 팀 사람들과 있었는데, 제가 중남미 영업 출신이라는 것을 제대로 보여줬던 순간입니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빅바이어들의 방문 기간을 생각하면 많은 에피소드들이 떠오릅니다. 제가 꿈꾸던 일을 하던 순간들이었고, 그날들이 영원할 것만 같았으니까요. 세상일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인연을 맺은 사람을 어디서 어떻게 만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먼 훗날에도 그 기억을 잊지 않아 주고, 저의 행동이 그의 기억에 남았을 거라 생각하면 앞으로의 모든 순간에서도 인연을 소중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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