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좋아했던 그 선배

17년 차 선후배 사이를 이어가는 가늘고 긴 밥 정

by 아는언니

오늘 '아는언니'의 아는 언니와 점심을 함께 먹었습니다. 대학교 다닐 때 언니는 그야말로 퀸카였습니다. 제가 소속됐던 대학 영자신문사에서 그 선배를 처음 보게 되었는데, 여자가 봐도 멋졌습니다. 영어를 잘하는 건 물론이요, 맨날 남자 선배들과 어울려 술을 그렇게 잘 마신다고 소문이 나있고, 담배도 간지 있게 피우던 그녀였는데 또 피부만은 백옥같이 하얬더랬습니다. 그러서 그녀를 먼발치에서 바라보던 꼬꼬마 후배인 저는 그녀는 부족할 것 없이 다 가졌구나 생각했습니다. 제가 대학 새내기 입학했을 때 그녀는 졸업반이었기 때문에 학번의 차이는 꽤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학창 시절 동아리에서 신문을 같이 만들지는 않아서 미운 정 고운 정 같이 들며 치고받고 할 사이는 아니었지만, 언니는 한창 어린 후배들의 콜에 늘 의리 있게 반응해주었습니다. 대학 졸업 후 이름만 대면 다 아는 주요 언론사에서 일하던 언니에게 몇몇 신문사 동호회 후배들이 찾아갔을 때 언니는 멋들어지게 삼겹살을 사주며, '소주 더 안 마셔?' 하고 애교 있게 후배들을 대해주셨습니다. 너무 이쁜데, 또 너무 능력 있고, 게다가 센스까지 있는 선배가 대단해 보였습니다. 한 번은 제가 취업준비를 할 때, 언니의 회사에 입사 지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지원서를 다 접수하고 언니에게 연락해서 지원했다고 전했더니, 직접 인사팀에 가서 학교 동아리 후배가 지원했다고 한 번이라도 잘 봐주라고 인사하고 왔다는 말을 전해주셨습니다. '아 이 언니는 천상계다.' 느꼈습니다.


취업을 하고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 언니와 제가 여의도 한복판 꽤 가까운 곳에서 일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가끔씩 만나서 점심 한 끼 나누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대학생 때는 정말 천상계 높은 곳에 있던 언니와 조금씩 가까워진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각자의 회사 이야기를 하면서 말이죠. 선배가 밥을 사면 후배는 커피를 사는 것이 그냥 무언의 규칙이라고 하면, 언니는 밥도 커피도 그리고 간식까지 사주면서 일하다 배고플 때 챙겨 먹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어디 있을 수가 있죠? 저는 조금 감동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먹는 것에 약한 저... 그러다 언니가 이직을 하여 같은 건물에서 일하게 되었고, 가끔씩 업계 동향을 나누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언니는 원래도 여신이었지만 더 아름다워지고 있었고 어느 날 결혼을 한다고 하였습니다. 얼굴에서 빛이 나는 것만 같았습니다.


결혼한 이후도 여전히 언니와 연락을 하며 지냈습니다. 언니가 임신하였을 때는 과일을 집으로 선물 보내기도 했고요. 왜냐면 언니가 보여준 후배를 대하는 정성은 아무리 돈이 많아도 쉽게 할 수 없는 성의라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런 언니가 저는 늘 좋아서 이번 추석에도 생각나서 가볍게 과일을 선물로 보냈습니다. 저는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선물로 꼭 과일을 보내거든요. 다른 것보다 과일 먹고 건강해지라고요. 언니와는 오랜만에 한 번씩 연락하지만 그렇게 거리가 꽤 멀어져도 밥 한번 먹는 것으로 그 거리를 오랜 시간에 거쳐 조금씩 좁혀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언니와 점심을 먹었습니다. 언니는 오늘도 회사 짭 밥 13년 차인 저에게 선배라는 이유로 밥과 커피를 다 사주었습니다. 정말 의리 오지고요. 이렇게 글을 쓰며 생각해보니 언니를 안지도 이제 17년이 되어가네요. 오늘 밥을 먹을 때는 처음으로 언니에게 최근에 소개팅한 남자들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렇게 소소한 이야기까지 한다는 건 엄청나게 편한 사이라는 것입니다. 언니는 딸이 벌써 학교에 입학할 만큼 키웠고, 싱글인 친구들이 소개팅 이야기를 해주는 게 제일 재미있다고 했습니다. 늘 언니가 즐거워할 이야기들을 제가 조잘대면, 언니는 잘 들어주었고, 오늘은 저의 조금은 시니컬한 소개팅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언니는 이런 저라도 상큼했다고 했습니다. 17년이라는 세월이 정말 빠르게 지나갔네요. 그리고 제 우상이었던 언니와 소소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이가 되기까지 17년이 걸렸네요. 그만큼 시간은 빠르게 가고, 가끔은 너무 빨리 친해지고 멀어지고 혹은 보지 않는 사이가 되는 것보다, 이렇게 거북이처럼 느릿느릿 오래 걸린 사이가 저는 참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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