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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리브노트 Dec 19. 2017

어서와~ 스위스 시댁은 처음이지?

시댁에 가면 언니는 할머니를 독차지하고 아가동생도 어느덧 조금씩 의사소통에 참여하고 있다.

독일어, 영어 그리고 한국어까지 3개 국어의 생일 축하 노래가 끝나고 시아버지표 당근케이크 위의 촛불이 훅 꺼진다. 올해는 백일 된 둘째 아이가 있어 우리집에서 남편의 생일파티를 하는 게 어려울 것을 아신 시어머니께서 시댁에서 축하 자리를 마련해 주셨다.


그럼 한국 며느리가 남편 생일파티를 위해 스위스 시댁에서 한 일은 무엇일까? 내가 시댁을 방문해 매번 하는 것들과 그곳에서 느낀 문화 차이들은 독일어 문화권 스위스 가정을 방문했을 때 대부분 해당되는 것들이라 소개해볼까 한다.


먼저 산책이다.

우리 가족은 바젤 시내에 살고 있지만 시댁은 바젤 교외의 한적한 시골 마을이다. 야트막한 산으로 둘러싸인 마을과 그 주변 언덕에선 소와 양을 풀어 키운다. 산 뒤로는 골짜기로 이어지는 높은 산이 있어 시댁 동네에서의 산책은 시내와는 질이 다른 상쾌함을 보장해준다. 특히 마을에서 기르는 오리와 토끼를 보러 가는 산책은 네 살짜리 첫째 아이에게 큰 즐거움이기도 하다.


물론 시내에도 공원과 텃밭, 공원묘지, 라인 강가 등 산책할 곳은 얼마든지 있긴 하다. 밖에 나가 신선한 공기를 쐬며 주인이 사는 동네 소개를 곁들인 산책은 중요한 손님 초대 일과 중 하나다.


두 번째는 아페로(Apéro).

작년 우리집에서 한 남편 생일파티에선 시어머니께서 아페로를 담당하셨다. 대추야자와 방울토마토를 반으로 가른 뒤 각각의 단면에 고추냉이를 가미한 맵싸한 맛의 치즈크림을 짜 넣은 핑거푸드를 만들어 오셨다. 직접 만들고 준비하신 시어머니의 정성이 느껴지는 음식이었다.


보통 행사의 시작이나 끝 무렵 샴페인 등의 가벼운 알코올을 핑거푸드와 함께 즐기며 친교를 나누는 행위를 아페로라고 한다. 이곳에선 큰 행사뿐만 아니라 작은 가족모임에도 꼭 아페로 시간이 있다. 한국 사람들이 유럽 문화권 식당에서 이해하지 못하는 것 중 하나가 음료를 꼭 시켜야 한다는 것인데, 자리에 앉자마자 주문하게 되는 이 음료가 자연스럽게 아페로의 역할을 한다.


하지만 이런 음식 대신 볶은 견과류나 감자칩처럼 짭짤한 시판 스낵에다 두어 종류의 주스와 음료로 아페로 음식을 대체해도 훌륭하다. 한마디로 기호에 맞춰 얼마든지 편하게 준비하면 된다. 아페로의 주 목적은 만남의 긴장을 풀고 분위기를 편하게 하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이날은 과일과 고추냉이 코팅 땅콩, 그리씨니 등의 시판 스낵으로 간단한 아페로를 준비했지만 제 목적을 충분히 달성했다.

아페로 후 전채인 호박수프로 식사를 시작하기 직전의 모습이다.

세 번째는 드디어 식사시간.

먼저 이와 관련된 손님과 주인의 역할에 대한 문화 차이를 말해보고자 한다. 식사를 준비하기 시작할 때 손님은 거들려고 하지만 주인은 편히 앉아 있으라며 만류하는 흔한 장면이 연출된다. 이곳에서는 실제로 그 말을 듣고 소파에 앉아 음식이 나오기만을 기다린다 해도 실례될 일은 전혀 없다. 아니면 다른 손님과 신나게 이야기하느라 신경도 못 썼다 해도 전혀 실례가 되지 않는다.


이 부분에서 유럽인의 개인주의적 성향이 잘 나타난다. 그 집의 부엌은 당연하게도 집주인의 영역이므로 도와주는 일손을 들이고 마는 것은 전적으로 주인이 결정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한국처럼 여자 혼자 식사를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부부나 커플이 함께 식사를 준비하기 때문에 혼자서 하는 것보다는 효율성이 높다. 물론 손님과 주인이 막역한 사이라면 서로 편하게 해도 된다. 하지만 내 집이 아니라는 것은 명심해야 한다.


여기에서 며느리로서 느끼는 한국과의 결정적인 문화 차이가 나온다. 시댁도 엄연히 우리집은 아니다. '새가슴' 한국 며느리는 독일어를 못 할 때도 눈치로 뻔한 일들은 돕곤 했는데, 시어머니가 이를 굉장히 고마워하셔서 내가 되레 어리둥절했던 기억이 난다. 며느리는 시댁에 가면 무조건 앞치마 먼저 하고 일부터 찾아 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유럽으로 시집 온 나에게도 뿌리 깊었던 것이다.


점점 시댁 부엌이 익숙해지고 나도 주부로서 부엌일이 손에 익으면서 자동적으로 일을 하게 된다. 대가족이 모이고 일이 많을수록 시부모님께서도 굳이 돕는 걸 만류하시지는 않는다. 하지만 내가 부엌에서 있는 시간이 길어진다 싶으면 설거지 하는 나를 돌려세우며 이렇게 말씀하신다. "할머니께서 너랑 이야기를 많이 못 하시잖니. 이제 그만하고 거실로 가렴" 즉, 손님과 주인은 서로 최소한의 시간은 친교를 나눠야 하는 것이다. 설사 몇 마디로 끝나거나 혹은 몇 시간을 앉은 자리에서 얘기한다 해도 모두들 이를 존중해준다.


하지만 모든 것들을 다 해야 할 의무는 없다. 누구든 컨디션이 좋지 않다면 산책을 생략해도 된다. 아페로 또한 주인이 시판 스낵 한 종류만 준비했다 해도 흠잡을 이유는 되지 않는다. 손님으로 갔다면 그저 주인이 준비한 것들을 즐기며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면 된다. 내 경우에는, 예를 들어 음식을 특별히 잘 하는 베트남 친구가 초대하면 식탁에 차려질 진수성찬을 기대하느라, 말이 잘 통하는 프랑스 친구의 초대라면 즐거운 이야기를 하다 올 생각에 마음이 설렌다.

햄버거 스테이크는 시아버지, 감자그라탕과 채소 곁들임 요리는 시어머니께서 준비한 남편 생일상.

그래서 요즘은 아페로 후 누워 쉬고 식사 후에는 정리만 거들고 또 누워 쉬고 있다. 심지어 혼자 산책을 안 가고 누워 있고 싶을 때도 모두 이해를 해주신다. 엄마가 되고 보니 제일 맛있는 음식은 남이 차려준 음식임을 깨달았다. 그러니 차려준 밥을 먹고 쉬며 큰 아이의 재밌는 놀이 상대도 있는 시댁에 가는 일이 어찌 즐겁지 않으리오. 당분간은 '다음에 좀 더 도와 드려야지' 하고 오는 날들이 계속될 것 같다.


그렇다면 제일 자주 초대받는 시댁에 갈 때 나는 뭘 기대할까? 엄마의 섬세함으로 그날그날 자식들의 기분과 컨디션을 살피시는 시어머니는 우리가 피곤하다 싶은 날이면 오늘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쉬라고 먼저 말씀하신다. 특히 둘째가 아직 어린 지금, 며느리인 나를 많이 배려해 주시는데 실제로 첫째 때와는 차원이 다른 피곤함을 느끼고 있긴 하다.


그래서 요즘은 아페로 후 누워 쉬고 식사 시간 뒤에도 정리만 거들고 또 누워 쉬고 있다. 가족들이 산책을 갈 때 혼자 안 가고 누워 있고 싶을 때도 모두 이해를 해주신다. 거기에 엄마가 되고 보니 제일 맛있는 음식은 남이 차려준 음식임을 깨달았다. 그러니 차려준 밥 먹고 쉬며 큰 아이의 재밌는 놀이 상대도 있는 시댁에 가는 일이 어찌 즐겁지 않으리오. 당분간은 '다음에 좀 더 도와 드려야지' 하고 오는 날들이 계속될 것 같다.

바젤=김선진 객원기자  reunite2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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