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산전우울증
갈수록 몸은 무거워지는데 덥고 습한 날씨에 불쾌지수는 최고점을 찍고 우울감도 하늘 높은지 모르고 올라간다. 첫째 아이를 낳고 가장 힘들었던 산후우울증. 둘째 아이를 임신했을 땐 시기가 좀 앞당겨진 것인지 임신 후기쯤 산전우울증이 찾아왔다. 셋째 아이는 그 시기가 더 빠르다. 임신 중기밖에 되지 않았는데 벌써 산전우울증이 슬금슬금 기어 나오려는 것 같다.
이런 기분은 꼭 임신으로 인한 호르몬 변화 때문만은 아닌듯하다. 업무 특성상 일 년 중 가장 일이 많은 시즌(농사로 치면 농번기)이다 보니 남편은 집에 잠만 자러 오는 수준이고, 이런 상황에서 곧 불어닥칠 여름방학을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해진다. 초등학생인 첫째도, 병설유치원에 다니는 둘째 아이도 여름방학 기간이 자그마치 한 달이다. 맞벌이 부부에게 기나긴 방학은 정말 지옥이다.
가장 큰 문제는 나의 우울함이 두 아이와 태아에 그대로 전달된다는 점이다. 신경이 날카로워진 상황에서 짜증을 확 내면 '아차'하는 생각과 함께 아이들이 있던 자리를 쳐다보게 된다.(이미 아이들은 보이지 않는 곳으로 사라진 후이지만..)
"엄마, 요즘 운전할 때마다 너무 많이 화를 내. 성격 나쁜 동생이 태어나겠어"라는 아이들의 이야기에 부끄럽기까지 했다.
#11 엄마 아빠만의 시간을 사수하라.
며칠 전 워터파크에 갔다가 온 식구가 호되게 감기에 걸렸다. 가뜩이나 몸이 힘든 상황에서 아프기까지 하다니.. 결국 연차를 쓰고 하루 동안 푹 쉬는 것을 선택했다. 아침에 두 아이를 등교시키고 이불 속에 파묻혀 있는데 어쩐지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몇 달 뒤면 이제 애 셋을 봐야 하는데'란 생각이 들면서 갑자기 마음이 촉박해졌다. (정확하겐 병가였지만) 황금 같은 휴가일에 가만히 누워만 있어야 한다니.. 이불 속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자리를 털고 무작정 영화관으로 향했다. 딱히 보고 싶은 영화가 있지도, 상영 시간도 알지 못했지만 대충 제일 빨리 볼 수 있는 영화 티켓을 끊어 좌석에 앉았다.
아쉽게도 영화는 그다지 재미있지 않았지만 그게 무슨 대수랴. 오로지 날 위해 2~3시간을 보낸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영화관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길, 도서관에 들러 책도 한 권 빌렸다. 매번 도서관에 갈 때마다 책을 읽지 못하는 둘째 아이의 책을 읽어주느라 내가 보고 싶은 책을 편히 본 적이 없었는데.. 대여한 책을 들고 산책길을 걷는데 '이곳이 무릉도원 아닌가'란 생각이 들었다.
교문 앞에서 하교하는 아이들을 기다렸다. 자유부인(?)이 끝났다는 아쉬움보단 즐거움이 더 컸다. 몇 시간 되지 않았지만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며 스트레스가 많이 사라졌고, 그만큼 두 아이에게 더 큰 사랑을 줄 수 있었다.
불현듯 몇 주째 평일, 주말 가리지 않고 업무에 치여 힘들어하는 남편이 떠올랐다. 새벽녘 퇴근을 하고 평소와 같이 스마트폰으로 웃긴 게시물을 구경하던 남편은 낄낄대며 나에게 '여행 간 아내를 기다리는 남편'이란 사진 한 장을 보여줬다. 텅 빈 집에서 하늘로 날아갈 듯 신나게 뛰어오르는 남편의 모습이 찍힌 사진 한 장은 참 많은 것을 의미하는 듯했다.
"아빠한테도 여름방학이 주어지면 뭘 하고 싶어?"
"음, 회사도 안 가고 아무 생각도 걱정도 안 하고 대학생 때 했던 게임을 온종일 하고 싶어. 이젠 그렇게 할 수 없지만 말이야(ㅋㅋ)"
로또 당첨만큼 어려운 소원도 아닌데 겨우 이런 게 소원이라니.. 남편에게도 오늘 나와 같은 자유를 느낄 수 있도록 시간을 줘야 할 것 같다. 기분 전환과 함께 그만큼 아이들에게 더 사랑을 주게 될테니 말이다.
임지혜 기자 limjh@olivenot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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