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OO이가..자꾸..나..싫다고 해..속상해..
1년 전 이맘때의 일이다. 태평이가 다니는 어린이집에선 새로운 친구가 올 때마다 아이들의 사진과 이름이 담긴 유인물을 가정에 보낸다. 그날도 놀이방을 치우고 있었는데 태평이가 몇 주 전 받아온 유인물 속 새로 온 친구 얼굴에 검은색 크레파스를 마구 칠해 놓은 거다. 순간 심장이 멎을 듯 너무 놀라 태평이에게 이유를 물었다. (아무렇지 않은 듯 태연하게 질문을 해야 아이들이 더 쉽게 대답해 준다. 부모의 길은 정말이지 끝없는 비포장도로다:;;;ㅎ) 아이의 대답을 듣고는 또 한 번 심장이 덜컹했다.
'드디어 때가 됐구나. 생각보다 빠르네'
바로 친구와의 트러블로 인한 마음의 상처. 물론 두세 살 때도 친구들끼리 싸운다. 하지만 그땐 아이들이 남보다 자신에게 집중하기 때문에 친구와 싸워도 잠시 '화'를 낼 뿐 돌아서면 괜찮아진다. 즉 '마음의 상처'를 받지는 않는다. 하지만 인지능력이 발달하고 사고가 깊어지는 네 살부터는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고 그 관계가 엇갈리면 때때로 상처를 받는다. 역으로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는 행동을 하기도 한다.
태평이의 얘기를 들은 다음날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담임 선생님과 상담을 했다. 알고 보니 새로 온 친구가 이런저런 사고를 치자 선생님은 발달이 빠른 태평이와 짝꿍을 시켰고 둘은 자유 놀이 시간을 제외하고는 늘 붙어 있었던 것이다.
세상에 태어나 누군가로부터 처음 '미움'을 받았던 태평이의 마음을 생각하니 마음이 찢어졌다. 얼마나 속상했으면 사진 속 친구 얼굴을 시커멓게 칠했을까.. 속에서 끓어오르는 화를 꾹꾹 눌러 담으며 선생님한테 해결책을 묻자 날아온 답변은
아이들은 다 그러면서 큽니다. 괜찮아질거예요
그 친구를 태평이와 짝지어 주고 아무 일 아닌 듯 반응하는 선생님이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어쨌든 이 분야 전문가니 일단 지켜보기로 했다. 하지만 그 뒤로 태평이의 상처는 갈수록 심해졌다. 전에는 입 밖으로 잘 나오지 않았던 단어들을 내뱉기 시작했다.
내가 나쁘게 하지 않았는데 OO이가 계속 나 싫다고 해.
나 안 행복해. 어린이집도 싫어
네 살 짜리 아이 입에서 친구 때문에 행복하지 않다는 얘기가 나오다니!! 이건 아니다 싶어 선생님한테 다시 상담을 요청했고, 선생님은 어차피 짝꿍을 바꿀 때가 됐으니 바꾸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 뒤로도 태평이는 계속해서 상처를 받았다. 짝꿍은 아니지만 그 친구가 부딪힐 때마다 안 좋은 말을 하곤 가버리는 상황이 반복됐다.
방임주의 교육관을 가진 선생님이 해줄 수 있는 방법은 더 이상 없을 것 같고 그 친구도 새로운 어린이집에 적응하는 스트레스 등 나름의 사정이 있을 테니 남을 바꾸려고 하기보다 먼저 내 아이의 생각을 바꿔야겠다고 생각했다.
대화를 해 보니 태평이는 모든 친구와 친하게 지내야 한다는 어른들의 말과 자꾸 자신을 싫다고 하는 친구 사이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헤매고 있는 듯 했다. 그래서 난 지극히 현실적인 어른들의 방식을 알려줬다. 지난 35년간 살아오며 맺은 수많은 관계 속에서 내가 깨달은 바를 말이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널 좋아할 수는 없어. 누구나 잘 맞는 사람이 있고 맞지 않은 사람도 있거든. 그러니까 그 친구가 너한테 싫다고 해도 상처받거나 아파하지 않아도 돼. 예를 들어 아이린이나 설현이처럼 널 좋아하는 친구도 있잖아. 그 친구들이랑 재미있게 놀면 돼. 널 싫어하는 친구랑은 놀지 않아도 돼. 엄마도 아빠도 그러거든"
이후로도 그런 상황은 반복됐지만 나는 태평이에게 이런 맥락의 얘기를 여러 비유를 들며 끊임없이 되풀이했다. 한달쯤 지났을까 태평이는 이전의 밝은 모습을 되찾았다. 태평이가 그 친구의 나쁜 행동에 반응하지 않고 알아서 피하기 시작하자 친구의 관심이 다른 친구로 옮겨간 거다.
한번씩 태평이에게 그 친구의 근황을 살짝 물으면 태평이는 쿨하게 답한다.
"OO이? 다른 친구들한테 나쁘게 하지. 근데 나한테는 안 그래. 그리고 나 OO이가 뭐라 해도 신경 안써"
1년이 지난 지금 태평이는 그 아이와도 무탈하게 지낸다. 물론 친한 친구로 꼽지는 않지만 말이다.
당시 어떤 엄마는 나의 해결책에 대해 "아이에게 친구랑 안놀아도 된다고 하는 건 너무 심하지 않나요?"라고 정색하며 반문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래도 친구잖니. 친구가 너보고 싫다고 해도 친하게 지내려고 노력해봐"라고 하는건 맞는 걸까? 나는 아이에게도 가끔은 현실적인 조언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임성영 기자 rossa83041@olivenote.co.kr
<저작권자 © 올리브노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