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족은 사람 얼굴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웹툰이나 소설을 드라마로 만들면 온라인 어딘가에서는 누가 캐스팅되어야 원작의 이미지와 잘 어울리는지 갑론을박이 벌어지곤 한다.
우리 가족은 그럴 일이 없다. 우리는 모두 얼굴 이미지를 떠올리기 힘들고 사람 얼굴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연예인을 기억 못 하는 건 기본이고, 자주 만난 사람들이라도 평소에 보지 않던 장소에서 보면 못 알아보기 일쑤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사람들을 잘 못 알아보는 건 굉장히 불편한 일이다 (특히 나처럼 그런 부분의 약점을 크게 노출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더더욱). 왜 나는 사람을 잘 알아보지 못할까, 타인에 대한 관심 부족? 눈썰미가 없어서? 사는데 좀 피곤하고 불편하지만 어쩔 수 없다 생각했는데, 애들도 자라면서 사람들을 잘 못 알아보는 걸 깨달은 때의 난감함이라니. 왜일까, 사람을 못 알아보는 것도 유전인가, 온 가족이 내향인이라 모두가 사람 얼굴을 기억 못 하는 건가 생각하던 중 방송인 박소현 씨에 대한 기사를 읽게 되었다. 방송인 박소현 씨는 기억력이 심하게 떨어져 힘들다며 그 예시로 프로그램을 세 번이나 같이 한 PD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한 일, 두 번의 소개팅을 같은 사람과 했는데 같은 사람인 걸 알아차리지 못한 일, 물건을 자주 잃어버린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오영은 박사가 이를 듣고 박소현 씨를 '조용한 ADHD'로 진단했단다.
이 기사를 읽은 순간 든 생각.
아. 애들 ADHD는 내 유전자의 영향인가?
(진단 전후 한참 ADHD 관련 기사 및 자료를 찾아 읽던 시기였다)
우리 집에서 이 분야의 최고봉은 단연 나다. 내 경험 중 비교적 가벼운 수준에서 심각한 수준까지 나열해 본다.
1. 연예인의 얼굴을 못 외우는 건 기본이다. 목소리 구분이 얼굴 인식보다 더 정확할 거 같다.
아이돌들 멤버를 구분 못 하는 건 기본이고, 얼굴을 익히려 열심히 노력을 해도 헤어스타일을 바꾸거나 옷을 바꿔 입으면 알아보지 못한다.
2. 팬데믹 시기, 모두가 마스크를 쓰니 사람들을 구분이 너무 힘들었다. 이목구비가 다 보여도 종종 누구인지 어려운데 눈만 보이는데 어떻게 사람들은 그리도 서로 잘 알아보고 인사를 하는 건지. 출퇴근 무렵 엘리베이터나 점심 식사 때 구내식당 등 불특정 다수가 모이는 공간이 너무도 불편했다.
3. 길에서 누군가 멀리서 아는 척하면 진짜 곤혹스럽다. 저 사람이 내가 아는 사람이라 나를 보고 인사하는지, 모르는 사람인데 내 주변에 있는 다른 누구에게 인사하는지 헛갈릴 때가 있다. 잘 눈치 보고 넘기는데 어림짐작이 틀려서 모르는 사람에게 인사도 종종 한다.
4. 몇 달을 같이 운동하며 주 2회 만나 인사를 했는데, 길에서 마주치고 인사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갈등, 다행히 상대방 표정이 변하는 걸 보고 아 그분 맞네 싶어 얼른 인사를 했다.
5. 2년 이상 같은 사무실에서 일한 사람인데 몇 년 만에 엘리베이터에서 만났을 때 헤어스타일이 바뀌어서 알아보지 못했다. 뭔가 눈치가 인사해야 할 거 같아 인사하고 (이럴 때는 우선 인사를 한다) 그분의 목소리 듣고 누군지 깨달은 후 자연스럽게 대화 마무리.
6. 10년 이상 같은 부서인 분을 길에서 마주쳤는데 그 사람인지 아닌지 확신이 안 서서 슬쩍슬쩍 보면서 비슷한 사람인가 아는 사람인가 고민했다. (10년 중 1년은 같은 프로젝트도 했다) 상대편 표정을 보고 아 그분 맞네 하고 인사.
7. 애들과 전시회를 갔다 지나친 사람이 15년 이상 같은 부서에서 근무한 분과 너무도 닮았는데 과연 맞게 알아본 건가 확신이 없어서 결국 그냥 지나침. 지나치고 한참 후에야 아 저 나이에 저 정도 키 큰 사람도 흔치 않은데 역시 맞았을 거 같다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지난 일이고 퇴사 후의 일이라 확인할 방법도 없었다.
8. 길을 지나가다 맞은편에 오는 분을 보고 시어머니인지 아닌지 알아보지 못하고 계속 쳐다봤다. 아니 이 시간에 그분 여기 계실 턱이 없으니 아니겠지 아니겠지 계속 생각하는데 너무 비슷해 보여서 서로 지나칠 때까지 흘끗흘끗 계속 쳐다봤다.
나는 결혼 20년이 되었고 시어머니와 같은 집에 3년을 살았다 (지금은 아님). 그런데도 못 알아보겠더라.
난 길을 걸으며 주변 사람들을 잘 관찰하지 않는다. 사람에 관심이 없으니 그런 거라 생각한다면 땡. 틀렸다. 관심이 없어 주의를 안 기울이는 게 아니고 주의를 기울였다 지인인지 아닌지 알아볼 수 없는 사람과 눈이 마주치는 게 더 무섭기 때문이다. 상대편이 나를 아는 척할 때 어머 못 봤어요 하는 게 내가 빤히 쳐다보면서 못 알아보는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
혹시 아는 사람인 것 같은 사람을 발견해도 쉽게 아는 척하거나 드러내고 쳐다보지 않는다. 내 전형적인 반응은 저 사람 내가 아는 그 사람 맞나 슬쩍슬쩍 관찰하는 것. 그러다 상대편이 날 보고 표정이 변하면 얼른 인사하고 아니면 아 그 사람 아닌가 보네 속으로 생각하고 지나간다. 영리한 말 한스도 아니고 상대편의 표정까지 읽어가며 정답을 유추해야 하는 신세라니.
(*영리한 한스는 덧셈을 할 수 있는 걸로 유명했던 말 이름인데, 검증 결과 숫자 계산을 할 줄 아는 게 아니고 정확한 횟수로 발을 구른 순간 사람의 반응을 보고 발구르기를 멈춘 거라 한다)
둘째도 만만치 않다. 한 번은 학원에서 돌아오는 버스에서 내게 전화를 한 적이 있다.
"엄마. 같은 버스에 내 근처에 앉은 내가 작년에 같은 반이었던 애인지 아닌지 모르겠어. 어떡해?"
(그걸 전화로 내게 소곤소곤 묻는다고 내가 뭘 할 수 있니...?)
친구들과 길 가다 맞은편에 오는 첫째를 못 알아보고 가는데 주변 친구들이 "야, 너네 언니 아니니?" 하며 "안녕하세요." 인사한 후 아 언니 맞네 깨달은 적도 있으니 얘도 나름 심각한 편인 거 같다.
유전적인 문제인지 궁금해서 언니들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언니 사람 얼굴 혹시 잘 알아봐? 나 안면인식장애가 있는데."
언니 1 답변. "나 그런 거 없어...(한참 다른 이야기 중) 아 그런데 엄마들 모이면 처음에는 인사하고도 잘 기억 못 해서 아는 엄마 옆에 앉아 슬쩍 물어봤어."
(언니. 그게 사람 못 알아보는 거 같은데...?)
언니 2 답변. "애들끼리 모여 있으면 다른 엄마들은 딱 보면 자기 애 알아본다는데 나는 찾는데 좀 시간이 걸리더라. 그런데 한 번 찾으면 그다음은 잘 봐."
(언니도 나처럼 움직임과 체형까지 포함해서 사람 인식하는 거 같은데...?)
언니들은 딱히 정상범주 바깥은 아닌 듯 하지만 사람을 알아보는 눈썰미가 크게 좋은 편도 아닌 거 같다. 그냥 내가 돌연변이고 애들에게 안면실인증 유전자를 물려준 셈 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