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가장 중요한 이정표, 오답노트

불행했던 가정사도 인생의 가장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by 묭작가

20살에 서울살이에 실패하고 내려와 알바를 전전하다가 역시 제과제빵이 가장적성에 맞는다고 생각하고 다시 한번 도전하게 된다. 인연이 있던 지방의 대형 제과점에 취직하게 된다. 그때 당시의 월급 146만 원은 한 달에 26일을 근무하고 받을 수 있는 돈이었다. 당시 시급에 비해 나쁘진 않았다. 월세와 생활비가 들지 않는 본가에서 지내며 일했기에 146만 원을 온전히 내가 사용할 수 있었다.


어렸을 때는 설날이나 추석에 용돈을 받으면 정말 그날에 다 쓰기 바쁠 정도로 경제관념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던 내가 적금을 100만 원씩 넣기 시작했다. 만큼 독립을 갈구했고 강하게 원했던 것 같다. 20살의 나에게 돈이란 유일한 무기였다. 집에서 아빠에게서 독립하려면 돈을 모으는 수밖에 없었다.


돌이켜보면 둘째라서 그런지 몰라도 나에게는 간섭이나 관심이 조금 덜 했거나 것 같다. 언니의 첫 월급부터 적금은 전부 아빠가 챙겨줬다. 하지만 내가 첫 월급을 받았을 때는 일절 한마디의 말도 없었다. 적금을 넣는 것부터 월급관리까지 전부 오롯이 혼자 해왔었다. 언니의 월급을 아빠가 관리해 왔다는 것도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뭐든 엄마, 아빠에게 처음인 언니는 챙겨주었지만 둘째인 나는 그냥 넘어가기 마련이었다. 가장 뚜렷하게 기억하는 것은 생일도 아닌데 사 왔던 케이크의 정체는 언니가 여자가 된 날을 축하하는 의미였던 것이다. 은연중에 기대를 했던 건지 몰라도 나도 초경을 하던 그날 화장실에서 들뜬마음으로 엄마에게 이야기했던 것 같다.

하지만 나를 위한 케이크도 축하도 내 기억 속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걸 생각해 보면 언니가 그 집에 지금까지고 같이 눌러살고 있는지 이해가 기도 한다. 그렇게 부모님의 사랑과 관심을 받으며 자라왔으니 밖보다 안이 편하게 느껴졌을 지고 모르겠다. 나는 둘째라 조금 덜 받았던 사랑이 나를 조금은 더 독립적으로 만들어 줬을 것 같다. 하지만 그렇다고 언니가 밉다거나 나에게 더 관심을 주지 않았나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오히려 신경 쓰지 않아 줘서 고마울 뿐이다. 나는 성격이 누가 챙겨주기보다는 직접 내가 스스로 해결하는 것이 더 편하기 때문에 그런 부분에서는 스트레스를 덜 받아서 좋았다.


그래서 그런지 나의 독립적이고 진취적인 성향에 더욱 관심이 덜 해졌던 것 같다. "너는 알아서 잘하니까." 커오면서 부모님에게 제일 많이 들었던 말인 것 같다. 그렇게 혼자서 생각하고 혼자 결정하고 혼자 책임지는 것에 익숙해져 왔다.


물론 그런 점이 나를 더욱 자유로우며 책임감 있게 만들어준 것 같다. 나는 17살에 기숙사에 들어갔지만 언니가 독립했던 건 29살일 정도로 생각보다 언니는 많은 제약을 받아왔다. 29살의 독립 또한 순탄치 않게 나갔는데 일언반구도 없이 갑자기 독립한다며 방을 구한 언니한테 아빠는 화가 나서 싸우기 일쑤였는데 20살이 넘은 시점에서 그게 화낼 일인가 너무 웃겼다. 심각해하는 언니의 상담을 들어주며 나는 별일 아니라는 듯 웃으며 언니를 다독여줬었다.


"근데 모은 돈 없이 나가면 살기는 힘들다~ 그건 알아둬~"


언니를 다독이기는 했으나 사실 아빠가 화내는 것도 조금은 이해가 가는 게 돈이라고 보증금 천만원정도 밖에 없는 요리도 못하고 청소나 빨래 등 집안일도 꼼꼼히 못하는 언니가 나간다고 하니 걱정부터 앞섰을 것이다.

나는 일찍이 서울 생활을 경험했기에 돈이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리스크라는 걸 알았기에 언니의 불안한 독립이 걱정되긴 했다. 하지만 29살. 실패하더라도 독립 한 번쯤 해봐도 되지 않은 나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어 응원해 줬다.


이사하던 날 그렇게 성질을 내던 아빠가 짐도 다 날라주고 그랬다는 걸 듣고 부모긴 부모인가 보다 싶었다. 역시나 언니는 혼자 살면서 사 먹기 일쑤였고 청소도 쌓이니 엄마를 불러 치워 달라고도 한듯했다. 일하랴 노느냐 정신이 없으니 당연히 집안일이 밀리기 일 수였다. 그렇게 어찌어찌 2년 정도를 버티다가 돈이 떨어졌는지 집에 들어오고 싶다는 언니는 내가 일본에 가는 시기에 맞춰 집에 들어오게 되었다.


나는 아빠의 간섭 없이도 착실히 월 100만 원이라는 금액을 1년씩 쭉 모아 오게 되었다. 생활비와 집세가 공짜였기에 더욱 가능했던 것 같다. 사치라고는 맛있는 것을 사 먹는 게 전부였던 나였기에 한 달에 46만 원은 풍요로운 금액이었다. 연차에 맞춰 월급도 올라가고 대회에서 받은 상금들도 간간이 들어왔다. 내가 마지막으로 받은 월급이 6년 차에 260만 원 정도 되었다. 전문직이다 보니 능력에 맞게 조금씩 높은 페이를 받을 수 있었다. 투잡으로 강의까지 나가면서 6년 차에는 월 300의 소득으로 정말 풍족했던 것 같다. 연애를 하면서도 적금은 100만 원 이상씩 꼬박꼬박 넣었었다.


6년이라는 집에서의 생활은 역시나 지옥.

집에 가면 맨날 아빠 뒷담이나 하는 엄마 아니면 엄마 뒷담하는 아빠가 있다. 제발 조용히 좀 살자 싶었다. 자취를 하게 되면 마음은 편해지겠지만 그만큼 돈이 나간다. 그렇기에 돈을 포기할 수 없었던 나는 일에 빠져 살았다. 야근 수당도 없는데 집에 가기 싫은 마음에 야근을 하는 날이면 더 신났던 것 같다. 회식이라는 회식은 다 참석하고 누군가 놀자고 하면 밤을 새워서라도 놀았다. 대회가 있다 하면 일 끝나고 남아서 밤을 새워서라도 연습했다. 그 덕분에 1년 차에 한 대회에서 전국 3위도 받아보게 됐었다. 렇게 하도 싶은 일을 충분히 해오다가 번아웃이 오면서 준비만 해오던 일본유학을 결심하게 된다.


나에게 부모란 인생의 오답노트다.

이렇게 살면 불행하게 된다. 가족에게 미움받는다.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나의 가정사가 나의 불행의 원인이 되었을지 언정 그 안에서 얻은 오답들은 나의 정답을 향한 밑거름이 되었다. 행복한 가정이었다면 더 나은 삶을 살았을지도 모르겠지만 최소한 지금의 독립적이고 책임감 있는 나를 만든 것은 그런 불행한 가정사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냥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만약에... 만약에 행복한 가정에서 살았다면 어땠을까?

이런 생각만큼 부질없는 것도 없다.

내가 가정 내에서 느낀,

가장 약자로서 느낄 수 있던 이 감정을

나는 대물림 하고 싶지 않았다.


이 경험이 훗날 나의 행복한 가정을 만드는 데에 있어 가장 큰 초석이 되었다. 의 어린 시절의 기억은 금도 살다가 힘들 때 한 번씩 그때를 돌이켜보며 잘못된 생각을 바로 잡을 수 있게 해주는 내 인생의 오답노트가 되었다.


그리고 23살에 연애를 시작하면서 결혼에 대한 고민을 했다. 그렇게 진로와 결혼의 고민을 안고

27살에 한국에 남자친구를 두고

일본유학길에 나서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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