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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명구 Apr 07. 2022

아시럽에서 발로 쓰는 사랑과 모험, 평화이야기 110

어머니의 미니스커트

       (어머니의 미니스커트)     

 슬픔에 옳고 그름이 없다. 눈물만큼 순수하고 빛나는 것이 어디 있으랴! 이유 없어도 우는 사람 옆에만 있어도 눈물이 나는 것이 인지상정인데 남의 슬픔을 조롱하지 마라! 얼음을 부수고 길을 만드는 쇄빙선 같은 숭고한 삶을 살다가 한순간 소용돌이치는 얼음덩이에 휩쓸려간 뜨거운 사내를 생각한다. 황량한 벌판에 내 눈물 몇 방울 떨구어야 비옥해지지 않는다. 중원을 달리며 땀과 함께 눈물이라도 흘려 진하게 살다 떠나는 노회찬을 마음으로 안고 보내야 했다.


 그에게 들이닥친 ‘법과 원칙’이라는 얼핏 보면 공정하고 만인에게 평등할 것 같은 괴물 앞에 뼛속까지 정의롭지 못한 지극히 인간적인 사람들의 희생이 이어지고 있다. 완벽하지 않지만 좋은 사람들에게 사악하고 교활한 사람의 손에 든 ‘법과 원칙’은 눈물과 감정도 없이 날카롭게 다가와 무자비하게 베어버리곤 한다.

 법과 원칙의 칼끝이 법 없이도 살 착하고 약한 사람에게 더 엄격하게 겨누어지는 현실이 안타깝다. 법과 원칙은 언제나 힘없고 비교적 의롭게 살은 사람들 앞서서 더 맹위를 떨쳤다. 그것은 법은 있으되 정의롭지 못한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다음 생이란 없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지금도 그렇다고 믿습니다. 그렇지만 다음 생이 또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때 만나는 세상이 더 정의롭고, 더 평화로운 곳이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온전하게 자기 자신에게 행복한 삶을 살아도 되면 좋겠습니다.” 유시민 작가의 추도사가 더욱 가슴을 날카롭게 파고든다.     


 눈물을 흘리고 닦으려 하니 또 눈물이 난다. 어머니를 생각하면 숭고한 삶을 살다간 분만큼이나 눈물이 난다. 내게는 어머니만큼 숭고한 사람은 없다. 작년 이맘때쯤 길을 나설 때 어머니 때문에 발길이 무거웠다. 늙고 힘없는 어머니를 홀로 두고 떠나는 마음이 아팠다. 내가 나가 있는 동안 어찌 될까 늘 노심초사했다. 이제 같이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왜 나는 좀 더 일찍 철이 들지 못했을까? 내가 돌아올 때까지만 이라도 아무 일 없기를 늘 기도했다.

 어머니는 나의 힘의 원동력이다. 힘들어 포기하고 싶을 때 어머니가 보여주었던 그 강인함이 나를 일으켜 세웠다. 군대 생활을 할 때를 제외하면 운명보다 질기게 늘 함께했던 분이다. 그래서 이번 여정도 웬만하면 같이 하고 싶었다. 차량 지원이 될 때부터라도 어머니와 긴 여행을 함께하며 어머니와의 시간을 장식하고 싶었다. 그마저도 어머니는 감당할 건강이 아니었다. 그렇게 강건하던 사람이었는데. 이제 베이징에 도착할 무렵 잠깐 다녀가시라고 했더니 얼마나 좋아하시는지!


 사막이 황량하지만 이 황량함이 감정을 비옥하게 해준다.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막막함 앞에 서면 사무치게 그리워지는 것이 있다. 그 어는 곳보다 깊고 넓은 푸른 하늘 아래 서면 겸손해지지 않을 수 없다. 이곳에 서면 일상에서 늘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것들이 얼마나 소중하고 축복이었던지 알게 된다. 생명 없는 곳에서 생명의 소중함에 감사기도를 올린다. 낳아주시고 길러주시고 60이 넘도록 까지 함께하여 주심에 어디 하나 숭고한 정신이 배어 있지 않은 곳이 없으니 눈물이 난다.     

 오늘은 몇 년 전 어떤 신문에 기고했던 ‘어머니의 미니스커트’란 글을 되새기면서 눈물을 조금 더 흘려야 할 것 같다. 어머니의 다리가 곱고 힘이 있을 때 함께 여행을 맘껏 하지 못한 것이 끝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어머니의 미니스커트     


 내가 아직도 엄마라고 부르는 어머니란 숙녀 분은 자신이 여자라는 사실도 잊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신의 이름도 잊고 산다. 엄마로서 아내로서 며느리로서 그리고 또 할머니로서 살고 있다. 자식을 위해서 남편을 위해서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는 해병대보다도 무섭고 거칠다는 대한민국 아줌마로 살아왔다.

 이제 이 숙녀 분은 거울도 안 보는 여자가 되었지만 나는 안다. 여자라는 것을 완전히 잊은 게 아니라 가슴에 묻었을 뿐이라는 것을!


 눈부신 햇살 아래 빨간 백합의 향기는 흐드러지는데 고단한 어머니의 다리가 나를 슬프게 한다. 어머니도 한때는 미니스커트가 어울렸을 때가 있었다는 기억이 나를 슬프게 한다. 나는 언제부턴가 쭈그러들고 고단한 어머니의 다리를 바라보는 것이 너무 죄스러워 애써 피해왔던 것 같다.

 그 무렵 미니스커트가 더 이상 어울리지 않아 헐렁한 치마를 입기 시작할 때에도 나는 내 청춘을 앓느라 눈치 채지 못했고 자식들을 돌보느라 당신의 몸은 돌보지 못해서 치마의 치수가 늘어나는 것을 서운해 할 때도 나는 내 등 뒤에 짊어진 삶의 무게만 버거워했을 뿐이었다. 지금도 의지하고 기대고 투정할 뿐 어머니의 다리를 시원하게 주물러 드리지 못한다.


 응석받이 나를 키울 때 어머니의 치마는 검정색 광목 치마였다. 광목 치마는 세상으로부터 나를 지켜주는 튼튼한 성벽이었다. 그 치마는 펑퍼짐하고 넓어서 나는 치마 주위를 통치하는 어린 폭군이었다. 낯설고 부끄러울 때 들어가 숨기도 하고 거기에 얼굴을 묻고 울기도 많이 울었다. 그 치마는 내 눈물, 콧물 다 닦아주는 손수건이었다. 어린 내가 어머니 무릎에서 잠들면 나를 덮어주는 포대기이기도 했다.

 탯줄이 끊기고는 젖줄을 놓지 않았고 젖꼭지에 빨간약을 바른 후부터는 치맛자락을 놓치지 않으려 몸부림을 쳤다. 치맛자락을 놓치면 길을 잃을까 불안했고, 홀로될까 무서웠고, 세상에서 가장 확실한 나의 편을 잃을까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리곤 하였다. 어머니의 치맛자락은 나의 탯줄이요, 젖줄이요, 세상으로 날기 위해 중심을 잡아주는 연줄이었다.     


 어머니의 치마가 어느 날 확 짧아지고 좁아졌다. 어머니가 처음 미니스커트를 입은 날이 어느 해, 어디로 나들이할 때였는지 기억할 수는 없다. 그러나 지금도 아주 뚜렷하게 기억하는 것은 어머니의 상앗빛 치마가 무릎에서 10cm쯤 올라갔다는 것이다. 치마 아래로 드러난 어머니의 다리가 가늘고 팽팽하게 윤기가 흐르고 싱그러웠다.


 짧은 스커트의 경쾌하고 산뜻한 느낌은 보기에도 자신감이 넘치는 젊음과 여성의 표현이기도 하였다. 아마도 까까머리 중학생이었을 나는 여자로 완성된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오이디프스의 콤플렉스처럼 가슴이 일렁거렸었다.

 1960년대 상대적으로 억눌렸던 여성들에게 다리를 많이 드러내는 대담한 미니스커트는 너무도 짜릿한 자기표현이었을 것이다. 1965년쯤에는 그 길이가 허벅지 중간까지 왔지만 여자들은 점점 더 대담해져서 치마의 길이는 점점 더 짧아졌고 초미니 원피스가 던져준 충격은 상상을 초월했다.


 우리나라에는 68년도에 인기가수 윤복희가 미국에서 활동하다 귀국해 미니스커트를 입고 텔레비전에 출연하여 온 나라를 술렁이게 한 사건이 되었다. 처음에는 여자들끼리도 '업소'에 나가는 여자라고 수군거리면서 하나둘씩 그 짜릿한 여자의 완성을 경험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경찰이 대나무 자를 들고 다니면서 무릎에서 20cm 이상 올라가면 풍기문란 경범죄로 처벌을 했다. 20 cm의 기준은 누가 어떤 절차를 거쳐서 정해졌는지 알수는 없다.


 아마 어머니가 미니스커트를 입은 것은 부러워하면서도 수군거리는 모순을 조금 더 즐기고 난 뒤였을 거다. 그전에 어머니의 외출복은 한복이었으나 월남치마도 입으셨고 무릎 아래 중간쯤에서 멈추는 주름치마라는 것도 입으셨다.

 미니스커트를 입은 어머니 손을 잡고 거리를 활보할 때, 그때가 그리워진다. 지금 어머니의 다리는 더 이상 푸르슴하고 팽팽하고 윤기가 나지 않아도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은 더욱 더 팽팽하고 푸르슴하다. 기둥이 집을 떠받치듯 어머니의 다리가 우리 세 남매 떠받친 커다란 기둥이었다. 그 짧은 치마 밑에 드러났던 가느다란 두 다리가 나의 삶을 지금껏 떠받쳐주는 억센 기둥이다.     


 시간이라는 게 한꺼번에 지나가는 것이 아닌데 허망한 시간을 헤아리지 못하고 당연히 그러려니 내가 방기하다시피 한 어머니의 슬픈 다리. 어머니의 다리는 해방과 전쟁을 넘어 간난의 질곡을 버텨온 큰 기둥 같은 다리이다. 미니스커트의 어머니 모습에는 회초리를 든 강한 어머니도 있었고 살려고 애쓰는 치열함도, 돌아서 눈물 흘리는 여인도 있었다.


 어머니의 다리는 나에게 잠시 아름다움이었다가 슬픔이고 어쩔 수 없는 좌절이다. 지금 더 이상 팽팽하고 윤기 나는 다리는 아니지만 그 두 다리가 지금껏 나를 떠받쳐준 억센 기둥이라는 것을 나는 안다. 어머니가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은 언제나 팽팽하고 윤기가 흐르며 싱그럽다.

 세상에 태어나 하늘 아래 살고 땅 위에 살 듯이 어머니 몸의 뿌리 하나 떼어 태어나 나이 육십이 다 되도록 치맛자락을 놓지 않고 같이 살고 있으니 나는 아직도 어머니의 탯줄에 매어 살고 있는 셈이다. 지금도 나는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놓치는 날이 올까봐 노심초사하고 있다. 지금은 어머니가 외로울 까 봐, 준비되지 않은 이별이 올까 봐 속으로 눈물 짓는다.


 오늘 나는 햇살이 젊은 날 어머니의 다리처럼 눈부시게 빛나고 팽팽하고 싱그러운 이 아침에 어머니의 고단한 다리를 오늘 처음 발견한 것처럼 바라본다. 어머니의 다리는 나에게 잠시 아름다움이었다가 슬픔이고 어쩔 수 없는 좌절이다. 젊은 날 초야에 옷고름을 풀고 사랑을 나눈 남자와 똑 닮은 나는 지금 아무도 부르지 않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어머니의 이름을 부르며 볼에 입맞춤을 하며 어머니가 여자란 사실을 느끼게 해드리고 싶다. "보배씨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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