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오늘 처음 만났다고 생각해 봐
그와 곱창을 맛있게 먹고 레지던스에 돌아오니 그가 세브란스 단절이라는 드라마를 보여주었다. 평상시에 드라마를 거의 안 보다시피 하는 나인데 그가 보여주는 드라마들은 무척이나 재밌게 보고 있었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뱀파이어에 관한 특별한 다큐멘터리부터 시작해서.
단절은 일과 사생활이 완전히 분류되는 삶을 가지고 싶은 사람들이 단절이라는 수술을 받고 로먼이라는 회사에 근무하는 내용이 나온다. 일하는 나는 개인적인 삶에 대해 전혀 알 수 없고 개인적인 삶의 나는 일하는 나의 정보를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이 콘셉트는 워라밸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많았다.
마이클은 뭔가 복잡한 드라마를 나와도 함께 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드라마를 보는 간간히 내 얼굴을 유심히 관찰하며 나의 반응을 지켜보고 내가 1화를 보자 2화가 보고 싶다고 하는 걸 보며 이걸 보여준 자기 자신한테 뿌듯해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우리는 2화까지 보고 하루를 다시 시작했다. 아침에 일어나 잠시 집에 다녀와서 필요한 물품들을 챙겨 오고 400일 기념 케이크를 픽업해 왔다. 마이클에게 케이크를 만들지 않을 거라고 했던 거와 달리 또 기념일 케이크를 만들어서 눈치를 봐야 했지만.
오늘은 나의 데이오프라고 무엇을 하고 싶냐고 해서 더 현대에서 진행하는 모네전에 가고 싶었으나 더 현대에 갔다가 싸웠던 기억이 있어서 게다가 여의도는 멀고 해서 그건 마이클이 미국으로 돌아가고 혼자 가기로 마음먹었다.
아니면 리움미술관을 가고 싶었으나 어느새 3시가 넘고 마이클이 준비를 하는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서 카페를 가고 저녁을 먹을 시간밖에 안 되는 것이라 조금 짜증이 났지만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가보려던 카페는 꽉 차 있어서 결국 내가 좋아하는(?) 자주 가는 카페에 자리가 있어서 그곳에 착석해 커피와 핫초콜릿을 마셨다. 바리스타가 남자친구한테 괜히 말을 걸고 (핫초콜릿이 따뜻하지 않다면 다시 만들어주겠다고 말하고 갔다.) 계속 힐끔힐끔 마이클을 보는 게 보여서 기분이 안 좋아지려고 했으나 마이클은 나를 강렬하게 쳐다보며 원화 가치 하락의 원인과 달러의 강세, 한국의 외환 보유 금액 등을 신나게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그의 경제적 얘기보다 다른데 눈 돌리지 않고 나를 마주 보고 나만 쳐다보는 그의 행동이 더욱 좋았다.
다만 그의 비유가 맘에 들지 않았는데 "한국은 개미이고 미국은 코끼리라고 생각하면 돼. 단지 대륙 차이라기보다는 이게 경제적 차이라고 보면 돼."라고 말했는데 그와 나 사이의 경제적 차이에 대해서도 얘기하는 거 같아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
기분이 나빴던 거와 달리 난 늘 그렇듯이 배가 고팠고 근처에 부자피자가 먹고 싶었으나 웨이팅이 너무나도 많고 해서 "피자가 먹고 싶어 아니면 오코노미야끼 어떤 게 좋아?"라고 하니 그가 “한국 피자를 먹고 싶어"라고 하길래 미스터피자 또는 피자스쿨을 보여주며 메뉴를 고르기 시작했다.
다행히 레지던스 근처에 피자스쿨이 있어서 카페를 내준 그에게 피자를 사 줄 테니 내일 아침을 만들어 달라는 (그가 해주는 감자볶음과 달걀 요리는 정말 최고다.) 딜을 했는데 과연 그가 아침에 만들어줄까?
피자를 포장하고 먹으려는 찰나에 그는 단절을 트는 것이다. 나는 "나는 먹을 때 드라마나 티비 보는 걸 안 좋아해. 먹는 것에 집중할 수가 없거든. 너는 드라마 보는 걸 좋아하는 편이야?"라고 물으니 그가 말하길 "오늘 하루종일 일해서 그냥 무언가 틀어놓고 싶어서. 나는 다른 거 볼 테니까 신경 쓰지 마."라고 해서 그와 나는 1년이 넘게 사귀었는데도 불구하고 서로 모르는 몰랐던 부분들이 있는 거 같아서 신기했다.
게다가 오늘 문득 든 생각이었는데 그를 카페에서 처음 만났어도 내가 그를 좋아했을까 생각해 봤다. 만나자마자 영어 문장을 고쳐서 얘기하게 하고 미국과 한국 경제의 차이 등에 대해 얘기한 그가 솔직하게 얘기하면 뭐 이런 새끼가 다 있을까라고 생각했을 거 같다.
그렇지만 키도 크고 외모는 마음에 들어서 그를 한번쯤은 더 보려고 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봤다. 그에게 "우리가 오늘 처음 만났다고 생각해 봐."라고 하니 "바보 같은 생각이야."라고 했지만 말이다.
레지던스에 돌아와 단절 3화를 보았고 중간에 빙고게임과 달걀 던지기 게임에 대해 나왔는데 미국 회사에서는 그런 게임을 회사 근무 중에 간혹 액티비티 식으로 진행할 때가 있다고 한다. 나는 몰랐던 정보였기 때문에 신기했다.
밥을 먹을 때 그가 혜자네라는 댓글을 보고 설명해 주길 바라서 김혜자 님을 언급하며 기대보다 양이 많거나 하면 김치공장을 운영하는 여배우 김혜자 님 이름을 가져와 그렇게 말한다고 하니 믿을 수 없다며 마이클은 챗GPT를 검색했다. 처음에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나중에 자세히 질문하니 김혜자 님을 언급하며 설명하여 마이클이 내 말을 믿었다. 이토록 배경 지식이 중요하구나 새삼스럽게 다시 느꼈고 그와 나는 미국인 한국인이구나 다시금 깨달았다.
나는 새벽 2시에 잠에서 깨서 글을 쓰기 시작했고 그는 곤히 자고 있다. 그가 온 지 2주가 되었다. 아직 2주가 남았지만 매일 일을 해야 해서 그와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고 그가 떠나고 나면 외롭게 봄을 맞이해야 할 것 같아 조금 싱숭생숭한 마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