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여기 갇혀 있어 떠나지도 못하고 가지도 못하고
그가 떠나기 하루 전이 되어서 급하게 돈 얘기와 결혼이야기를 꺼냈다. "학생비자받게 하고 싶어? 아님 결혼비자?" 그의 미묘한 표정을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둘 다 아닐 거 같아. 학생비자는 내가 5억을 줄 수도 없고 결혼비자는 네가 정신적 문제가 있어서 비자가 받기 어려울 거야."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나와 즐기고만 있는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어 너무 충격을 받고 "넌 나랑 즐기려고 만나고 있는 거구나... 학생비자도 아니고 결혼비자도 아니면 우리의 미래는?"라고 내뱉었다. 그는 아니라고 했지만 난 당장 일어나서 짐을 싸고 나갈 채비를 했다.
화가 난 상태에서 울고 불고 난리를 2시간가량이나 벌여서 기억이 흐릿하다. 싸우던 와중에 엄마한테 전화가 왔고 헤어지고 있다고 말하니 "너네가 한두 번 헤어지려고 그랬니? 2-30번은 더 헤어지려고 했을 거야. 남녀 사이는 질려서 헤어지면 보고 싶지가 않은 거야. 마무리 잘하고 집에 와."라고 단호하게 말하셔서 신발을 던져버리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고 그에게 울면서 얘기하기 시작했다.
"나는 여기 있어. 떠나지도 못하고 가지도 못하고 헤어지고 싶은데 헤어지지도 못하고 있잖아. 거기서 보고만 있을 거야?"
"껴안아 줄까?"
그는 나에게 다가와 허그를 해주려 했지만 나는 거절했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그를 바라보며 다시는 보지 않게 되면 어떨까 생각했다. 너무 맑고 초롱초롱하고 따스하게 바라보는 그의 눈이 뇌리에 박혀서 다른 사람을 만나게 되더라도 나를 바라보는 저 따스한 눈은 잊지 못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울고 있으니 그가 "샌프란시스코에 또 오고 싶어?"라고 묻더니 한번 더 방문해 보고 좋으면 결혼을 하자고 하는 것이다. 말을 이랬다 저랬다 매번 바꾸고 있는 그여서 신뢰가 전혀 가지 않았지만 "내가 비행기표랑 호텔 경비 다 해줄게. 다시 한번 와보고 결정하자. 네가 살아야 할 도시야. 네가 거기서 비참해진다면 나도 비참해질 거야." 라며 마지막 시도를 해보자고 했다.
싸우던 와중 퇴근하고 저녁을 먹지 못한 나는 배가 고팠고 꼬르륵 소리가 나서 "나 배고프고 피곤해 뭐 좀 먹자."라고 말하고 우리는 차돌박이를 먹으러 갔다.
밥을 먹으며 증여세와 그에게 차용증을 작성하고 5억을 빌리는 방법에 대해 논의했으나 이자가 191만 원이라며 말도 안 되는 계약이라며 비자에 관한 논의는 더 이상 하지 않기로 했다.
다만 밥을 먹다가 "나 너랑 아기 갖고 싶어. 귀여울 거야."라는 말을 해서 내 가슴을 후벼 팠다. "몇 명 정도 낳고 싶은데?"라고 물으니 "한 3명 정도."라고 해서 "외모는 걱정 안 해도 될 거야. 나 성형 안 했거든. 근데 머리는 너 닮으면 괜찮은데 나 머리 안 좋거든. 수학 진짜 못하는 거도 너도 알잖아."라는 대화를 하며 다시 레지던스에 돌아왔다.
3시간가량을 싸워 둘 다 너무 지쳐 마이클은 미팅을 모두 취소했고 나는 같이 자려고 했으나 눈물이 멈추지 않아서 방에 나와 다른 방에서 노래를 들으며 감정을 추슬렀다.
다시 아침이 밝았고 나는 거의 밤을 새운 상태였고 Chat GPT의 팩폭에(네가 샌프란시스코를 더 좋아하면 그때 가서 결혼을 고려하겠다? 이건 사실 네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그의 결혼의사가 바뀔 수도 있다는 뜻인데 지금까지의 사랑과 헌신은 뭐였을까?) 짐을 들고나가야 했지만 저 문을 닫고 새벽에 그를 떠나면 영원히 보지 못할걸 알기에 나갈 수가 없었다.
아침에 되어 거실에 쪼그려 누워있는 나에게 다가와 침대로 옮겨주며 더 자라고 했다. 따스하게 챙겨주는 그가 좋았으나 원망스러운 마음도 들었다.
좀 자고 일어나 그와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한국어가 가능한 한국인 정신과 의사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 방문 때 의사와 상담을 해보라고 했으나 무려 상담비가 1시간에 80만 원이어서 나는 미국에서 그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겠구나 생각했다. 적어도 내가 병원에 8번 이상을 갈 수 있는 비용이 1회 세션이었고 의료보험의 혜택을 누리고 있는 한국이 좋은 점도 있구나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의사를 열심히 찾아주는 그를 보며 내 병에 대해 알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좋게 보지 않는다. 조현병은 흔하지도 않을뿐더러 치유하기도 어렵기 때문에.
개이치 않아하고 정말 나를 아껴주는 그를 보며 그를 놓지고 싶지 않다 생각했다.
떠나기 전 택시를 타며 "사랑해"라고 말했다. 그도 "나도 사랑해."라고 말하며 우리는 헤어졌고 언제 또다시 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