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의 나라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변화
미국에서 축구가 야구보다 인기가 높아졌다는 소식은 단순한 스포츠 순위의 변동이 아니다. 이는 오랫동안 '국민 스포츠'로 불리며 미국 문화의 근간을 상징해 온 야구의 시대가 서서히 저물고, 새로운 문화적 질서로 이동하고 있다는 강력한 신호다.
최근 발표된 2024년 4분기 여론조사 결과는 이러한 변화를 알려준다. 물론 1년 전의 데이터이지만 중요한 것은 변화의 추이이다. 미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스포츠'를 꼽는 문항에서 축구(Soccer)가 야구(Baseball)를 앞질렀기 때문이다. 물론 미식축구(American Football)는 여전히 압도적인 1위를 지키고 있다. 그러나 그 바로 아래 순위에서 벌어진 이 변화는 결코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니다. 미국 스포츠 문화의 '기본값'이 흔들리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데이터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조사 전문 기관 "암페어 애널리시스(AmpereAnalysis)"가 발표한 2024년 기준 설문 결과에 따르면, 미국인 응답자의 10%가 축구를 가장 좋아하는 스포츠로 꼽았다. 이는 전통적인 '국민 스포츠'로 불려온 야구(MLB)를 근소하게 넘어선 수치다. 미식축구(NFL)는 30%를 넘기며 여전히 1위를 지켰고, 농구는 18%로 그 뒤를 이었다. 수치만 보면 작은 차이처럼 보일 수 있지만, 이 1~2%의 이동은 미국 스포츠 문화 지형이 어느 방향으로 기울고 있는지를 분명히 보여준다.
'America's Pastime', 왕좌에서 내려오다
야구는 한 세기 넘게 미국인의 일상이자 자부심이었다. 이닝별로 이어지는 공수의 변동과 휴식은 미국인의 생활 리듬과 잘 맞았고, 라디오 중계와 지역 공동체를 통해 확산되며 미국적 정체성의 일부가 됐다. 'America's Pastime(미국의 여가)'라는 표현은 야구에만 허락된 고유 명사였다.
야구장은 경기장이기보다는 거실에 가까웠다. 이닝이 바뀔 때마다 자연스럽게 생기는 공백은 관중에게 숨 돌릴 틈을 줬고, 사람들은 그 사이 팝콘을 사고 맥주를 들고 자리에 돌아왔다. 야구는 반드시 집중해서 봐야 할 스포츠보다는, 함께 간 동료들과 즐겁게 여가를 보내는 영화 같은 엔터테인먼트에 가까웠다.
하지만 시대가 변했다. 야구의 인기가 차갑게 식지는 않았다. 다만 왕년의 미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던 야구는 미국 문화의 뜨거운 중심부에서 한 발 비켜서 있다. 야구가 지켜왔던 자리에 축구가 차츰차츰 비집고 올라온 배경에는 미국 사회의 인구 지형 변화뿐 아니라, "경기를 끝까지 지켜볼 인내심"이 점점 사치가 되어가는 시대 분위기가 깔려 있다.
축구는 어떻게 미국에서 인기스포츠가 되고 있을까
먼저 인구 구조의 변화를 봐야 한다. 축구는 누가 뭐라해도 세계에서 가장 인기있는 스포츠 종목이다. 이 인기스포츠 축구가 미국에도 서서히 스며들어 왔다. 다문화 가정과 이민자 사회가 확대되면서, 축구는 더 이상 특정 계층의 전유물이나 '외국 스포츠'가 아니게 됐다. 글로벌 문화에 익숙한 MZ세대는 축구를 편견 없이 '우리의 스포츠'로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이는 곧 축구가 다문화 미국 사회를 하나로 묶는 새로운 보편 언어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여기에 리오넬 메시라는 압도적인 아이콘의 등장은 결정적인 가속페달이 됐다. 세계 최고의 스타가 미국 프로축구(MLS) 무대를 누비기 시작하자, 축구는 단숨에 변방의 취미에서 강력한 주류 엔터테인먼트로 격상됐다. 메시를 보기 위해 구름처럼 몰려드는 관중과 천문학적인 중계권료 수익은 축구의 위상이 어디까지 올라왔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무엇보다 현대인의 라이프스타일 변화도 큰 몫을 했다. 전·후반 각각 45분, 멈추지 않는 시계, 끊임없이 오가는 공. 축구에는 '쉬어 갈 타이밍'이 거의 없다. 잠시 눈을 돌리는 사이 승부가 갈리고, 한순간의 방심이 곧 득점으로 이어진다. 축구 관람은 휴식이 아니라 집중을 요구하는 경험이다.
이 점에서 축구는 오늘날의 미국 사회와 묘하게 닮아 있다. 짧고 강렬한 콘텐츠, 즉각적인 반응, 밀도 높은 몰입을 선호하는 시대에 축구의 리듬은 점점 더 설득력을 얻고 있다.
미국은 왜 축구를 'Soccer'라고 불렀을까
미국이 오랫동안 축구를 'soccer'라고 불러온 이유는 역사적이다. 19세기 영국에서 축구는 원래 'Association Football'이라 불렸고, 이를 줄인 영국식 속어가 바로 'Soccer'였다. 이후 영국은 축구라는 명칭을 'Football'로 정리했지만, 미국은 이미 그 단어를 자기들만의 방식인 '미식축구'에 사용하고 있다.
이 명칭은 단순한 단어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세계 스포츠 질서와 거리를 두고 미국만의 문화를 구축해 온, 이른바 '미국 예외주의'의 언어적 산물이다. 미국인들에게 'Football'은 오직 손으로 공을 잡고 거칠게 부딪치는 미식축구여야만 했다.
트럼프가 'Soccer'를 'Football'이라 부른 순간
그런데 이 견고하던 언어의 벽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변화의 파도는 정치의 언어에까지 닿았다. 2025년 12월 5일(현지시각),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워싱턴 D.C. 케네디센터에서 열린 2026 FIFA 월드컵 공식 조 추첨식에 참석해 축구를 언급하며 'Soccer'가 아닌 'Football'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트럼프는 이 자리에서 "미국에서 축구를 '사커'라고 부르는 것은 이미 '풋볼'이라는 이름을 미식축구가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라며, 세계 대부분의 나라처럼 축구를 '풋볼'로 부르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고 말했다. 미식축구 리그(NFL)의 명칭을 다시 생각해봐야 하지 않겠느냐는 농담도 덧붙였다.
단순한 말실수로 치부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상징성은 결코 가볍지 않다. 미국식 언어와 문화적 경계를 누구보다 강하게 주장해 온 인물이 공개 석상에서 이 오래된 논쟁에 뛰어들었다는 사실 자체가, 미국 사회에서 축구의 위상이 어디까지 와 있는지를 보여준다.
언어는 권력이고, 단어의 선택은 곧 문화적 승인이다.
단어가 바뀌는 순간, 문화도 바뀐다
지금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단순히 어떤 스포츠가 더 인기가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야구가 밀려났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본질은, 미국이 더 이상 자기만의 언어로 세계를 밀어낼 수 없게 되었다는 현실이다. 끝까지 'Soccer'를 고집하던 나라에서, 축구가 야구를 넘고 대통령까지 'Football'이라 부르기 시작한 것은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다.
미식축구는 여전히 왕좌에 앉아 있다. 그러나 그 아래에서는 이미 판이 바뀌었다. '외국 스포츠'였던 축구는 이제 설명이 필요 없는 일상이 되었고, '국민 스포츠'였던 야구는 이제 경기 규칙보다 추억부터 설명해야 하는 스포츠가 됐다.
언어의 변화는 늘 느리게 찾아오지만, 한 번 바뀌면 되돌아가지 않는다. 미국이 끝까지 'Soccer'라는 이름을 붙잡고 있을지, 아니면 결국 세계의 흐름을 따라 'Football'을 받아들일지는 조금 더 지켜봐야 할 것이다.
다만 분명한 사실이 하나 있다.
이제 미국에서 "진짜 풋볼이 무엇이냐"고 묻는 질문은, 더 이상 농담으로만 들리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