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통달 Jul 03. 2023

나는 왜 운전대만 잡으면 분노하는가

어느 찌질한 40대 운전자 이야기

“빵빵!”


비보호 좌회전 차선에서 대기하고 있는데, 뒤차가 경적을 울린다. 갑자가 성질이 끓어오른다. 반대편 차선에서 차가 직진해 오고 있어서 기다리고 있는데 빨리 가라고 보채는 뒤차가 몹시 기분 나쁘다. 내려서 시비라도 걸어볼까 하다가 그냥 핸들을 돌렸다. 혹시 경적을 울린 그 뒤차가 내 옆 차선에 올까 서행을 했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창문을 내리고 욕을 하기 위해서.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차는 슬그머니 내 옆 차선 뒤로 뒤로 빠진다. 내 얼굴을 본 모양이다. 아침부터 인상을 쓰고 누가 건드려라, 내가 상대해 주마라고 하는 듯의 40대 말기의 성질 더러운 아저씨의 얼굴…



운전대만 잡으면 3:1도 문제없다?



눈부신 4월 벚꽃이 피는 계절이었다. 뒤에 아이들을 태우고 ‘봄바람 휘날리며 흩날리는 벚꽃잎이 울려 퍼질 이 거리’를 구경하기 위해 차를 몰았다. 차선 2개가 나란히 가다 쓰윽 갈라지는 길을 가고 있는데 옆 차선에 있던 차가 갑자기 내 차 앞으로 확 끼어들었다. 반사적으로 급제동을 하며 핸들을 틀었다. 근데 그 차는 미안하다는 쌍깜빡이 표시 한 번 없이 유유히 사라지려 하고 있었다.



호흡이 가빠 오고 맥박이 분당 5만 번(?)으로 급격하게 늘어났다. 한마디로 꼭지가 돌았다는 말이다. 급가속 페달을 밟았다. 상향등을 번쩍번쩍하며 따라갔다. 앞차는 갓길로 정차했고, 나도 따라서 갓길로 정차했다. 뒤에 타고 있던 아이들은 아빠, 싸우지마를 외치며 울고, 아내는 그만하라고 말렸다. 안전띠를 풀고 내렸다. 그 차에는 젊은 남자 3명이 타고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3:1의 수적 열세를 재빨리 간파하고 피했을 테지만 운전대가 주는 힘은 3:1이 아니라 30:1도 상대할 수 있는 힘을 주었다.



그 뒤의 상황은?


뭐, 뻔하지. 가진 것 없는 중년 사내 한 명과 가오만 넘치는 젊은 사내 3명의 의미 없는 욕설과 말싸움… 4명 모두 최소한의 준법정신을 지키며 경제적 타격을 우려해 물리적 폭력은 주고받지 못하고 언어적 폭력만 난무하는 꼴같잖은 모습.



10분 정도 지나자 참다못한 옆에 타고 있던 아내가 나왔다.



“자! 보세요. 그쪽이 저희 차 앞을 끼어든 것은 사실이죠? 그럼 미안하다고 먼저 사과하셔야죠. 제 남편도 그쪽이 미안하다는 손짓이나 쌍깜빡이 한 번이었으면 이렇게까지 화를 내지 않죠. 당신도 다짜고짜 욕을 하면 어떡해? 그러니 서로 사과하고 끝내요. 지금 뭐 하는 짓입니까? 애들 보는 앞에서…”



아내의 말을 듣던 그 젊은이들은 나에게 사과를 했고, 나도 그들에게 사과를 했다. 그렇게 상황은 아내의 단호한 판결에 의해 종료되었다. 그 젊은이들은 차를 몰고 재빨리 사라졌고, 나는 뻘쭘하게 차를 타며 아이들에게 말했다.



“아빠 멋있지?”


“아니, 바보 같아”




차와 내가 하나가 되는 물아일체(物我一體), 내가 그렇다



“자동차는 마차가 엔진이라는 기술을 통해 발전한 발명품이다. 그래서 아직까지 자동차의 힘을 표현하는 말도 마력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마차는 말이 끌기 때문에 사람을 발견하면 멈추도록 훈련을 받는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조금 다르다 우리나라는 마차 문화가 아니라 가마 문화이다. 가마는 타고 있는 사람 중심의 운송 수단이다. 가마가 움직이면 사람들은 모두 피하거나 고개를 숙인다. 사람이 중심이 아니라 가마, 즉 운송 장비가 중심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차를 타기만 하면 욕을 하고 이성을 상실한다. 가마 문화 습성을 버리지 못한 것이다.”



어느 책에서 본 내용이다. 차가 단순한 운송수단이 아니란 말이다. 운전대만 잡으면 차와 내가 물아일체(物我一體)가 되고, 어느 순간 나의 생각이 차의 생각이 되고, 나의 의지가 곧 차의 의식이 되는 차와 운전자가 혼연일체(渾然一體)가 되는 경지에 이른다는 말이다.



TV와 인터넷에는 차량운행영상기록장치, 소위 블랙박스 영상을 소재로 한 프로그램이나 콘텐츠들이 홍수처럼 쏟아진다. 그러한 내용들 중 상당수가 분노, 이성 상실, 어이없음, 욕설이다. 물아일체와 혼연일체의 싸움이다. 가끔은 초원에 있는 육식동물들의 싸움같이 느껴진다. 법과 상식이 없는 자연상태의 원초적인 싸움 말이다.



차 안은 자신이 완벽하게 통제하는 공간이다. 핸들의 움직임에 따라 자동차의 방향도 움직이고, 음악이나 에어컨 등 실내 편의시설도 운전석에서 모두 이루어진다. 그래서 이를 방해받으면 쉽게 분노가 발생한다. 특히 평소 자기중심적이고 원하는 대로 잘 안되면 화를 잘 내는 사람은 운전대를 잡으면 그 증상이 더 심해진다. 내가 그렇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차와 내가 물아일체, 혼연일체의 경지가 되어버리니 차와 자신을 동일시하게 된다. 그래서 내가 경험한 뒤에서 경적을 울리거나 끼어들기 같은 타인의 행동이 악의가 없는 단순한 행동이라고 해도, 자신의 영역을 침범·무시한다고 생각되어 쉽게 분노하게 되어 난폭운전이나 보복운전으로 쉽게 이어지는 것이다. 내가 그렇다.



전문가들은 '차'라는 공간이 일종의 집과 같은 자신만의 공간화가 되면서 차에 타는 순간부터 내가 누구인지 감춰지는 일종의 익명의 상태가 된다고 한다. 익명성을 바탕으로 하루 동안 받아왔던 스트레스를 해소하고자 하는 욕구가 강해지면서 충동적으로 자기 나름의 승부욕과 성취욕 등 잘못된 희열감을 느끼고자 난폭운전을 하게 되는 것이라고 한다. 또한 아직 운전이 미숙하거나 겁이 많은 여성 운전자를 보고 비웃고 자신이 더 우월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보여주기식 난폭운전도 있다고 한다. 현실에서의 찌질함을 운전을 하면서 폭력적으로 해소하는 것이다. 내가 그렇다.

차 안은 자신이 완벽하게 통제하는 공간이다.


난 안되겠다



거래처에 갈 일이 있어 또 운전대를 잡았다. 차와 내가 물아일체나 혼연일체가 되면 안된다. 차는 차고 나는 나다. 차는 운송수단일 뿐이다. 현실의 찌질함을 운전을 하면서 해소하지 말자. 숨 한 번 크게 쉬어 본다. 그래, 오늘은 마음 편하게 안전운전 해보자. 그런데 상습 정체구간에 다다르자 차가 심하게 막힌다. 그 순간 어떤 여성이 운전하는 수입 외제차가 내 앞에 슬금슬금 끼어든다. 나도 모르게 욕이 나온다.



“이런, 2곱하기 9…”



어휴… 난 안되겠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