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리그 토트넘을 만난 5부리그 탬워스의 마법 같은 FA컵 이야기
“우리 선수들이 자랑스러울 뿐입니다. (Nothing but proud)”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에 이변은 없었지만, 영국의 작은 마을 탬워스는 승패의 결과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을 만큼 자부심이 가득한 하루를 보냈다.
지난 12일 세계에서 가장 유례 깊은 잉글랜드 축구협회(FA)컵 64강전에서 1부리그 토트넘과 5부리그 탬워스가 맞붙었다. 프리미어리그로 분류되는 1부리그는 그야말로 어나더레벨, 모든 선수의 꿈인 최상위 20개 팀이다. 24부까지 있는 영국에서 5부리그는 세미프로로 분류된다. 대부분의 선수가 생계를 꾸리기 위한 직업을 갖고 축구를 병행한다. FA컵은 1부에서 10부리그에 속한 팀들이 토너먼트 단판 승부 형태로 참여하는 대회로, 프리미어리그팀은 3라운드인 64강전부터 참전한다. 이번 2024-2025 FA컵 64강전에는 2개의 5부리그팀이 살아남았고, 이 중 한 팀은 최상단에 있는 프리미어리그팀과의 싸움이 확정됐다.
FA컵의 마법은 3라운드 대진표 추첨식부터 시작됐다. 생중계로 대진 추첨 장면을 보던 탬워스 사람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3라운드까지 살아남은 5부리그팀으로서 그나마 덜 센 팀을 만나 한 단계라도 더 높게 올라가길 바랄 수도 있겠지만, 이들은 프리미어리그팀, 그중에서도 빅식스라 불리는 세계 최고의 팀과 맞붙고 싶다고 염원했다. 바람대로 빅식스팀과 붙게 된 탬워스는 3라운드 경기를 치르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했다.
https://youtube.com/shorts/Hd-V2E6r1VI?feature=shared
인구 8만명의 도시인 우리 마을에 세계 최고의 팀이 온다는 설렘, 세계 최고의 선수들과 경기를 한다는 기대감으로 탬워스에는 활력이 넘쳤다. 토트넘 선수들이 열악한 시설에 놀라지 않을까 걱정된다며 경기장 곳곳은 보수 공사에 들어갔다. 곰팡이가 올라오고 수압이 일정하지 않은 샤워실을 수리했고, 경기장 관계자들이 앉을 벤치를 20석 정도 추가로 설치했다. 원정팀 락커룸을 토트넘의 상징색인 네이비블루와 화이트로 페인트칠했으며, 토트넘 관계자들을 위한 공간을 꾸밀 케이터링 업체를 확인하며 손님맞이에 공을 들였다. 과열 경쟁 상태에서 사방팔방으로 상대팀을 긁으며 홈경기의 이점을 극대화하는 데 익숙한 프리미어리그 시청자들에게 탬워스의 풍경은 정말로 낯설었다.
탬워스의 환대는 경기 당일에도 계속됐다. 토트넘 선수들이 탄 버스가 경기장에 들어오자 동네 사람들이 순식간에 몰려들었다. 보통의 홈팬들은 상대팀에게 야유를 보내며 기선제압을 하는데, 탬워스팬들은 TV로만 보던 토트넘 선수들이 내리자 환호성과 야유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다 웃어버리곤 했다. 친선경기를 치르러 온 슈퍼스타를 보려고 모인 팬들의 모습과 흡사했다. 경기장 티켓은 일찌감치 매진됐고, 매장에는 이날의 경기를 기념하기 위해 특별히 제작한 티셔츠, 스카프, 머그잔을 사려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전날 내린 눈과 유난히 추워진 날씨에 경기가 연기될 뻔도 했지만, 경기장에 쌓인 눈을 치우고 정비하려고 자발적으로 나온 봉사자들의 열정은 한파마저 몰아냈다.
본격적인 경기가 시작되기 전부터 변수가 발생했다. 경기를 시작하는 킥오프 직전, 골대의 망이 내려앉고 있는 것을 발견한 탬워스 선수들이 동료를 목마를 태워 테이프로 골망을 수리하느라 경기가 지연됐고 이 모습은 영국 전역으로 생중계됐다. 당장 경기를 뛰어야하는 선수들이 골대를 수리하고, 그것도 테이프로 칭칭감아 임시방편으로 붙여놓는 모습이라니. 안그래도 티켓을 구하지 못한 주민들이 담벼락 위에 자리를 잡고, 집안에서 창문으로 경기 '집관'중인 사람등 여기저기서 이색 풍경을 양상하고 있었는데, 팽팽한 긴장감이 맴돌아야 할 경기장은 휘슬을 불기 전까지도 정겨움이 가득했다.
https://x.com/emiratesfacup/status/1878421809491505183?s=46
탬워스의 마법 같은 이야기는 경기력에서 폭발했다. 탬워스 선수들은 축구선수 대 축구선수로서 대등한 경기를 펼쳤다. 수비진을 따돌리며 공을 뺏기지 않는 고급 기술 마르세유턴을 선보이기도 했고, 골키퍼는 놀라운 선방으로 슈팅을 막아냈다. 심지어 경기 막판에는 탬워스가 골대 바로 앞에서 위협적인 유효슈팅을 선보이기도 했다. 쉽게 결판날 것으로 보였던 싸움은 연장전까지 이어졌다. 토트넘이 주전 선수들을 대거 투입해 체급으로 찍어 누르며 승리를 가져가긴 했지만, 이 경기를 연장전까지 끌고 온 언더독의 반란에 사람들은 열광했다. 놀라운 경기를 시청한 사람들은 이것이야말로 ‘FA컵의 마법’이라고 표현했고, 영국 BBC에서는 ‘역사적인 날의 탬워스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탬워스 선수들을 주목했다.
https://youtube.com/shorts/NgdWrxn9xEk?feature=shared
경기 후 탬워스 감독 앤디 피크스는 “우리 팀이 매우 자랑스럽다. 큰 이변을 일으킬 뻔했기 때문에 아쉽지만, 동시에 엄청난 자부심을 느낀다. 모든 선수들이 최선을 다했고, 우리가 상대한 팀을 생각하면 우리 선수들의 경기력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훌륭했다”라고 인터뷰했다.
사실 5부리그와 프리미어리그는 비교가 무의미할 정도로 차이가 크다. 천연 잔디가 상시 관리되는 6만 2,850석 규모의 토트넘 훗스퍼 스타디움에 비해 탬워스의 홈 경기장 더 램 그라운드는 4,065석 규모로 협소할 뿐만 아니라 경기장에 경사가 있고 인조 잔디가 깔려있다. 전석 매진이 일상이고 매 경기가 전 세계로 생중계되는 프리미어리그와 달리, 5부리그의 경기는 주목받는 게 오히려 특별한 일이다. 토트넘과의 경기를 앞두고 탬워스가 티켓 매진 소식을 구단 SNS에 알리는 모습, FA컵을 앞두고 방송 송출을 위한 간이 중계석이 설치되는 모습은 이색적일 수밖에 없다.
스포츠는 타고난 재능의 영향이 상당한 분야로 알려져 있다. 선수 주급 총합이 6억 6,700만 파운드(약 1조 1,900억원)인 토트넘의 선수들은 축구하는 게 일이자 사명이겠지만, 150파운드(약 27만원)에서 400파운드(약 70만원)를 주급으로 받는 탬워스 선수들이 축구만 하며 살아가기에는 쉽지 않다. 탬워스 선수들은 샌드위치 업체 사장, 벽돌공, 자라(ZARA) 매장 직원, 건물측량사, IT 업체 매니저 등 축구와 병행 중인 밥벌이 직업을 갖고 있다.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하는 나이와 선수로서의 수명 등을 고려한다면, 축구가 아닌 다른 적성을 찾아 전념하는 게 수입을 늘리는 방법일지 모른다. 하지만, 탬워스 선수들은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축구에 투자한다. 주 3~4회 운동을 하고, 주말마다 5부 리그의 경기를 치르며 축구 선수로 경기장을 뛴다. 프로와 아마추어 사이. 세미프로로 애매하게 분류되는 5부리그 선수들이 감동을 주는 이유는 축구를 사랑하는 그들의 진정성이 큰 울림을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남들이 인정해 주지 않아서, 전문가라고 내세울 자신이 없어서 하고 싶은 일을 진행하지 못하고 있고, 그렇다고 포기하지도 못해 속앓이만 하게 될 때가 있다. 주저하게 되는 이유는 수없이 만들어낼 수 있지만, 뛰어보지도 않고 시간을 축내는 것보단 탬워스의 선수들처럼 내가 뛸 수 있는 경기를 찾아 계속해서 뛰어보는 게 더 행복한 삶이지 않을까. 팀의 순위가 어떠하든, 어느 리그에 속해 있든 하고 싶은 일을 놓지 않는 사람은 누가 뭐래도 프로다. 그렇게 매일 운동을 하고 공을 차다 보면 탬워스처럼 7부리그에 있던 팀이 6부를 넘어 어느새 5부 리그에 오르고, 세계적인 프리미어리그 선수들과 경기하는 마법 같은 날도 만날 수 있는 게 인생이니까.
“아쉽지만, 내일부터는 현실의 일자리로 돌아가야 할 때.”
0-3으로 패배하며 3라운드에서 도전을 멈추게 된 탬워스의 선수들은 밥벌이를 위한 일터로 발길을 돌려야 한다. 누군가는 샌드위치 배달을 하러 가야되고, 누군가는 여러분의 최애 자라 매장 판매 직원의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하지만 이들은 돌아오는 주말이면 유니폼을 입고 남아있는 5부 리그 경기를 치를 것이며, 다음번 FA컵에서의 활약을 기대하며 축구 실력을 키워나갈 것이다.
자신의 한계를 규정하며 무료한 나날을 보내기보단 좋아하는 축구로 삶을 가득 채워 일(Work)과 삶(Life)의 밸런스를 충족시키는 탬워스 선수들이야말로 워라밸을 만끽하는 사람들 아닐까. 두 발은 땅을 디디되 가슴 속엔 큰 꿈을 키우라는 체게바라의 명언이 회자되곤 한다. 현실을 살아가는 낭만주의자들의 여정에 행복과 성장의 기쁨이 가득하길 바란다.
https://x.com/tamworthfc/status/1879152521991913584
덧붙여 말하자면,
언더독의 전설. 제이미 바디는 8부 리그부터 올라와 27세에 프리미어리그에 입성했다.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저녁에는 축구를 하던 8부 선수는, 5~7부 리그를 거쳐 레스터시티에 입성했고, 2부리그에서 프리미어리그로 승격한 팀 레스터시티의 우승을 이끌었다. 2018년까지는 잉글랜드 국가대표로도 선발되어 활동을 펼쳤으며, PL 득점왕, 올해의 선수 등 개인 기록 역시 화려하다. 삼십대 후반인 지금도 여전히 레스터 시티의 주장으로서 프리미어리그 최정상 공격수로 활약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