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변한다. 변화를 즐길 수 있는 담대한 내가 되기를.
가끔 이십대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른 사람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 아예 다른 인격체로 분리해도 될 만큼 성격, 태도, 가치관, 사소한 습관까지 달라진 면이 많다. 이십대 때의 나는 불같고 대쪽 같았다. 지금의 나로서는 상상도 못 할 만큼 내 주장을 강하게 펼쳤고, 글을 쓰는데 있어서도 과감했다. 세상의 모든 이슈를 심판대에 올려놔도 명쾌한 판결을 내릴 수 있을 만큼 나의 판단에 두려움이 없었다. 도대체 무슨 근거로 나의 결정이 정답이라고 확신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근거 없는 자신감도 쌓이다 보면 자존감이 되어 있곤 했다.
글을 쓰고 말을 하는 데 주저하기 시작한건 ‘나의 생각이 변할 수도 있겠구나’를 인지한 순간부터였다. 자유를 절대 가치로 보고 예술을 신성시하던 시절,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예술인의 작품은 도덕적 잣대와 별개로 평가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적이 있었다. 1930년대 한국 작품인 김동인의 단편소설 『광염소나타』를 소재로 하여 일필휘지로 적어낸 글은 그해 여름, 나를 언론사 인턴 기자에 합격시켰다. 시간이 흘러 언론사와는 전혀 다른 곳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지만 막힘없이 써 내려간 그 글이 종종 떠오르곤 했다. 사회 전반에서 터져 나오는 성 추문 사건과 미투 운동 앞에서 나의 가치관이 처음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예술성보다 도덕성이 우위에 설 수 있겠다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기도 했다.
나의 생각이 변할 수 있다는 건 꽤나 충격적인 일이었다. 변할 수 있다는 건 지금의 결정이 정답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불확실성을 인정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틀릴 수도 있다, 변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쓰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일에 제동을 걸었다. 모든 것이 명확했던 이십대의 나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내가 믿고 있던 모든 것들이 정답이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를 지배했고, 확실한 답을 찾을 때까지 모든 결정을 보류하려는 지금의 나는 결론 내지 못한 수많은 문제 앞에서 무력하게 정체되어 있었다.
한때는 인생을 퍼즐판과 같다고 생각했다. 빠르게 조각을 찾아 빈 칸을 채우면 꿈꾸던 그림을 선명하게 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인생에 정답은 없고, 내가 그리는 인생의 청사진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이십대에 그려놓은 밑그림과 채색을 그저 초안으로 남겨두기보다는 과감하게 수정하고 덧칠하는 게 삶을 대하는 최선의 태도가 아닐까. 그렇게 수정 보완을 거듭하다 보면 밀도 있고 깊이 있는 나만의 작품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삶이 무료할 때마다 나는 축구 영상 클립을 찾아본다. ‘상대편 골대에 골을 더 많이 넣은 팀이 이긴다’는 전제를 두고 세계인의 눈을 공 하나에 집중시키는 매력적인 스포츠. 골을 넣는다는 명확한 목표 달성을 위해 선수들은 하루에 수백 번씩, 때로는 천 번이 넘는 슈팅 연습도 마다하지 않고 공을 찬다. 언제든지 변할 수 있는 잔디 상태, 풍량, 상대 팀의 전략과 골키퍼의 위치 등 어떠한 변수가 발생하더라도 골을 넣겠다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세밀한 영점조정을 이어간다. 슈팅하는 발도 바꿔보고 방향을 틀며 위치 조정을 할 때도 있겠지만 미세한 차이를 감각적으로 익히고자 세밀한 영점조정을 반복한다. 정해진 골대에 골을 넣는 슈팅에도 수많은 기술과 변주가 실리는데 변화무쌍한 세상에서 삶의 목표에 걸맞게 생각을 키우고 대응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 아닌가 싶다.
인생에는 끊임없는 영점조정이 필요하다. 어떤 그림이 그려질지 알 수 없지만, 크고 작은 변화가 만들어낸 여정에 행복과 뿌듯함이 충만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