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의 햇살 유진이에게

by 이지하

어제까지 비가 내려 축축하던 공기가 오늘은 햇빛을 담아 바삭거렸어. 나는 아침부터 바지런히 움직였어. 알폰스 무하 원화전을 보러 가는 날이었거든. 그리고 유진아, 당연하게도 나는 너를 생각했어. 봄날의 햇살 같았던 너. 알폰스 무하를 좋아했던 너.

2년 전 내가 겪은 일 기억해? 교권 침해. 교통사고 같았던 그 순간을 반복하여 떠올리다 피폐해진 나는 잠시 학교를 떠나 있어야 했어. 가만히 누워 있으면 자꾸만 땅속으로 꺼질 것 같아 무작정 집을 나선 어느 날, 알폰스 무하 미디어전시 광고가 내 눈에 들어왔지. 훌쩍 찾아간 전시장의 관람객은 나뿐이었어. 벽면을 가득 채운 그림 속 여인들이 음악에 맞춰 일렁이며 나를 휘감는데 황홀하더라. 그 느낌을 간직하고 싶어서 나오는 길에 작은 마그넷을 샀어.


며칠 후 다시 출근한 나를 멀리서 알아본 너는 내게 달려왔어. 작고 어린 네가 말없이 나를 꼭 안아준 순간 온몸에 불이 켜지는 것 같더라. 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다른 사람을 통해 치유될 수 있다는 말은 그럴 때 쓰는 거였어. 그렇듯 누구에게나 따뜻했던 너. 애니메이션 전공을 희망한 네가 수시로 친구들의 얼굴을 그려준 덕분에 교실은 너의 애정이 담긴 그림으로 가득했었지.

기억나, 유진아? 학교에 돌아간 내가 얼마 후 각자 좋아하는 것을 소개하도록 했던 수업 시간 말이야. 알폰스 무하의 그림이 섬세하고 관능적이라 좋아한다는 네 발표를 듣고 얼마나 신기했던지. 반가운 마음에 교무실에 돌아와 갖고 있던 마그넷을 네게 건네주었을 때, 기뻐서 펄쩍펄쩍 뛰다가 만세 동작을 한 채 달려 나가던 네 모습은 얼마나 사랑스럽던지. 마그넷이 주인을 제대로 찾아간 것 같아 나는 얼마나 뿌듯했던지. 그래서 나는...


지난 겨울에 전해 들은 소식을 믿을 수 없었어. 방에서 조용히 잠들었던 네가 아침에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 그래서 급히 119를 불러 병원으로 옮겨졌다는 것. 피로가 쌓여 잠시 의식을 잃은 줄 알았던 네 상태가 생각보다 심각했다는 것. 네가 그렇게 치열하게 준비했던 대학 합격 소식이 전해졌는데도, 너는 결국 깨어나지 못한 채 우리 곁을 떠나갔다는 것.


세상 모든 사람의 목숨은 귀하다고 하지. 그런데도 나는 네가 유독 아까웠어. 이제 훨훨 날아갈 일만 남았었는데, 너는. 그래서, 장례식장에서 밥도 먹지 못하고 고개 숙인 채 울던 네 친구들도 교사들도 어찌할 바를 몰라 가슴을 부여잡았지. 그곳에서 너의 어머니는 네가 학교도서관에서 빌렸다는 김애란의 ‘바깥은 여름’을 담임선생님에게 건네주었어. 꼭꼭 씹어 읽었을까. 다 읽었을까. 맑고 고운 얼굴의 네 영정 사진에 인사하고 나와 올려다본 하늘이 예뻐서, 눈이 부셔서 눈물이 났어.

네가 떠나고 석 달 후 알폰스 무하 원화전이 시작되었어. 그리고 오늘 난 그곳에서 계속 너를 찾아다녔어. 미술관의 그림 속에도, 잔잔히 흐르는 음악에도, 그 공간을 향기롭게 떠다니는 공기 중에도 어쩌면 네가 있는 것 같아서 말이야. 그리고 생각했어. 그가 그린 포스터 속 여인들의 머리카락도, 속눈썹도, 손가락도 옷의 주름도 너는 이렇게 찬찬히 살펴보았겠구나. 네가 말한 알폰스 무하 그림의 섬세함과 관능적인 것이 이런 것이었구나. 그도 너처럼, 너도 그처럼 매혹적인 선으로 세상을 사로잡았구나.

미술관을 나서면서 나는 2년 전 네게 건넸던 것과 똑같은 마그넷을 사 왔어. 이번엔 누구에게 주지 않고 잘 간직하려고 해. 교무실 내 자리에 붙여두고 지내는 어느 날, 또다시 2년 전 그날처럼 피할 수 없는 순간이 나를 찾아올 때, 갑자기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 때, 막막한 마음에 어디로 향할지 모르는 내 눈길은 문득 마그넷을 향할 거야. 천천히 그림을 응시하면서 나는 너를 떠올릴 거야.


온 세상을 두 팔 벌려 끌어안은 채 온 힘을 다해 사랑하다 떠난 네가 그곳에서는 두통 없이 행복하길 기도할게. 많이 고마웠어. 보고 싶다. 유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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