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전야엔 <사랑의 블랙홀>을.
새해 카운트다운이 어제 같은데, 벌써 2월이라니.
1월의 마지막 날은 연말만큼이나 내 삶을 돌아보게 되는 것 같아요. 호기롭게 세운 새해 목표를 1월 동안 잘 지켰나. 해가 바뀌며 다짐했던 숱한 '올해는 꼭'들이 1월 내내 유지가 됐나. 난 잘 살고 있는 것인가!
이토록 어지러운 2월을 앞두고 보기 좋은 영화가 있어요. 바로 <사랑의 블랙홀>입니다.
<사랑의 블랙홀>은 2월 2일에 열리는 특별한 마을 행사 취재를 위해 시골 마을에 내려간 괴팍한 기상캐스터 아저씨가 2월 2일에 갇혀버리고 마는 내용의 영화예요.
성격 더러운 주인공 아저씨 필은 모든 게 맘에 안 들어요. 나 정도 되는 캐스터가 직접 시골 마을에 와야 되는 것도, 취재 내용이 쥐한테 예언을 듣는 괴상한 행사라는 것도 다 맘에 안 들어서 얼른 끝내버리고 다시 돌아가려고 해요. 친절을 베푸는 사람들한테 못되게 대하고 하대해요.
그래서 다음 날이 되자마자 마을을 떠나려고 했는데, 자고 일어나니 다시 2월 2일 행사 당일인 거예요. 그날을 시작으로 필은 뭔 짓거리를 해도 하루가 지나면 다시 2월 2일이 되는 블랙홀에 갇히게 되고 그렇게 매일매일 같은 하루를 살아요 무려 6개월도 넘는 시간을요.
마음에 안 드는 장소와 날짜에 갇혀버린 필은 처음엔 '모든 게 리셋된다'라는 전제를 못된 짓에 써요.
중범죄를 저지른다거나, 여자 꼬시는 데에 많은 시간을 쓰기도 하고요. 매일 같은 말을 건네오는 사람들 말을 잘라먹으면서 상처 줘요. 카메라 앞에서는 행사와 마을 욕을 퍼부어요. 어차피 내일이면 다시 리셋이니까.
그렇게 살다가 필은 미쳐버려요. 그래서 필은 죽기를 택합니다. 그는 수십 번을 자살해요. 다양한 방법으로 목숨을 끊지만 다음날이 되면 다시 2월 2일 오전 6시 침대 위.
그렇게 불멸(?)하게 된 필의 주 목표는 좋아하는 여자(=같은 방송국 신입 PD) 꼬시기인데 첨에는 무조건 상대가 좋아할 말만 하고 상대에 대해 잘 아는 척해서 라포 형성하려고 하거든요. 근데 그렇게 해도 마지막엔 결국 자꾸 실패해요. 성공한 것 같다가도 여자 주인공 리타는 마지막에 필을 떠나요.
실패에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던 필은 리타 꼬시기를 중단하고 뭔갈 통달한 마음으로 살기 시작해요. 내게 주어진 하루를 나를 위해 쓰는 게 아니라 남을 위해 쓰는 방식으로요. 피아노를 배워서 파티에서 연주를 하고, 얼음을 깎아 사람들을 기쁘게 하고, 시간 맞춰 뛰어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아이를 몇 번이고 구하고, 2월 2일에 죽는 운명을 가진 노숙자에게 따뜻한 밥을 대접해요. 내일이면 사라질 방송에서 최선을 다해 감동의 말을 전하고요.
아이러니하게 사랑은 이때 성공해요. 상대를 꼬시기 위한 하루를 사는 게 아니라 나를 위해, 그리고 마을 사람들을 돕는 일, 기쁨을 주는 일을 하며 하루를 보냈을 때 상대가 먼저 반하고 다가와요. 그리고 마음이 미움으로 가득했던 필은 마침내 마을 사람들과, 이 이상한 마을, 그리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게 됩니다.
수백 번째의, 그러나 (나와 남 모두을 위해 살았던) 최초의 하루를 살아냈을 때, 비로소 길고 긴 하루가 끝나고 내일이 돼요.
말하자면 '내가 좋은 사람이 되어 내게 좋은 사람이 올 수 있도록' 같은 흔하고, 조금은 유치한 문장으로 영화를 정리할 수 있겠네요. 그런데 우리는 이 당연하고 유치한 얘기를 자주 잊고 사는 것 같아요. 그걸 잊고 어떻게 살 것인지,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인지 따위의 무한한 고민들로 머리가 복잡해질 땐 뻔한 영화 <사랑의 블랙홀>을 보면 오히려 명료해집니다.
제가 본 <사랑의 블랙홀>은 지구멸망을 앞두거나 시간의 블랙홀에 갇힌 마당에 남을 위해 이타적으로 살라고 하는 영화가 아니에요. 필의 태도는 모두를 위하지만 그 모두에는 필도 포함이잖아요. 원래 주는 건 되려 받는 것이기도 하듯이 무언갈 위하는 그 마음은 절대 바깥으로만 휘발되진 않는 것 같아요. 타인에게 무언갈 말하면 그걸 듣는 사람은 타인과 나 둘인 거니까. 그 사실을 기억하려고요. 남을 위한다는 건 나의 행복을 포기하는 희생이 아니라 나의 행복을 위한 수단임을. 너를 위함으로써 나를 위하는 것임을. 세상이 절망적일지라도 그게 내일로 향하는 가장 똑똑한 길임을 늘 잊지 않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