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쌩쌩하게 만드는 한 마디
프랑스 베르사유 정원에서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왕비의 촌락’이 있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루이 16세에게 선물 받아 직접 꾸민 이곳은, 장엄하고 화려한 베르사유 정원과는 달리 아기자기하고 사랑스럽다.
영화 <마리 앙투아네트>에서 왕비의 촌락을 처음 접하고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이 공간에 반했었다. 사치의 아이콘 마리 앙투아네트가 자신만의 공간을 가장 향토적으로 꾸미고 그 안에서 시간을 보낸 것이 매력적으로 느껴져 베르사유 궁전보다도 더 궁금했다.
그러나 왕비의 촌락은 거대한 베르사유 궁전을 거쳐, 더욱 거대한 베르사유 정원을 지나야만 나오는 곳이기 때문에 보통 체력으로는 가기 힘들다. 지친 이들을 위해 왕비의 촌락과 베르사유 정원을 오가는 코끼리 열차도 왕복 운행하고 있을 정도.
나는 이미 한번 베르사유에 갔었지만, 그 웅장함에 압도되어 왕비의 촌락까지는 가지 못했었다. 다음으로 미루고 지친 몸을 이끌고 돌아왔던 기억이 있다. 그렇기에 이번 주말에 함께 베르사유에 가자는 친구들의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왕비의 촌락을 위해서라면 이미 다 본 베르사유 궁전을 또 봐도 괜찮았다. 이번에는 기필코 왕비의 촌락에 가리! 굳은 다짐과 함께 베르사유로 향했다.
몇 시간 동안 베르사유 궁전과 정원을 관람한 후 왕비의 촌락으로 향하는 길목 앞에 섰다. 친구들은 모두 추위와 체력 고갈로 인해 피곤해 보였다. 분명 출발 전까지만 해도 왕비의 촌락도 함께 가겠다고 했던 친구들의 눈이 빛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코끼리 열차 왕복비는 너무 비싸고, 그렇다고 걸어가기에는 멀다며 가기를 주저하는 눈치였다.
급기야 한 명이 자기는 먼저 파리에 돌아갈 테니 너희끼리 보고 오라고 말했다. 나머지 친구들은 기다렸다는 듯 ‘나도’를 외쳤다. 혼자만의 시간을 좋아하는 나는 전혀 서운하지 않았고 오히려 느긋하게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설렜다. 서로를 잘 몰랐을 때라면 피곤함을 참고 나와 함께 가주려고 했겠지만, 이젠 내가 혼자 잘 다니고 또 그것을 즐긴다는 걸 아는 친구들은 빈말도 없이 떠날 채비를 했다.
그때까지 카샤는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왕비의 촌락을 가고는 싶은데 너무 피곤하다며 친구들을 따라 파리로 돌아가는 쪽으로 마음이 기운 참이었다.
마침 통화를 하고 있던 엄마에게 자문하겠다며 몇 발짝 뒤로 물러나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하기 시작했다. 얼마 뒤 수화기 너머의 대답을 들은 카샤는 크게 웃으며 우리에게 돌아왔다.
“와하하! 애들아, 우리 엄마가 뭐라는 줄 알아?”
그의 고민을 들은 엄마는 기가 찬다는 듯 이렇게 소리쳤다고 한다.
“헛소리하지 말고 당장 지은을 따라가!”
교환학생 생활하는 동안 카샤를 통해 내 이야기를 익히 들은 카샤의 엄마는 내가 모험을 좋아하는 걸 알고 있다. 한국에서 온 여자애가 혼자 용감하게 여기저기 쏘다닌다며 만난 적도 없는 나를 자랑스러워한다. 그러니 춥다느니 피곤하다느니 잔말 말고 지은이를 따라 새로운 경험을 쌓으러 가라고, 파리 시내로 돌아갈 생각은 추호도 하지 말라고 소리친 카샤의 엄마. 그 목소리에서 힘을 얻은 것인지 카샤는 금방 쌩쌩해졌다.
친구들을 보내고 카샤와 나는 돈도 아낄 겸 왕비의 촌락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인터넷 리뷰에서도 거리가 상당하니 절대 걸어가지 말라는 말이 대다수였던 그곳은, 직접 걸어보니 2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뭐야, 이렇게 가깝다고? 별로 멀지도, 힘들지도 않네! 우리는 함께 웃으며 으스댔다.
다른 이들의 부정적인 의견을 무시하고 직접 해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뿌듯함과 자기애로 우쭐대며 우리는 왕비의 촌락 입구로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그날, 나는 카샤와 함께 인생에서 손에 꼽힐 정도로 아찔하고 특별한 모험을 했다.
이날 카샤를 쌩쌩하게 만든 그 목소리가 나의 가슴에 남아있다. 현실로 돌아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모험을 주저할 때마다 내 안의 카샤네 엄마가 소리친다. 헛소리 말고 당장 모험해. 처음 보는 길을 당당히 걸으란 말이야. 주문 같은 말을 되뇌면 베르사유 정원만큼 커다란 용기가 샘솟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