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까치는 까치끼리, 까마귀는 까마귀끼리
에세이 출간 기념(?)으로 홍보를 위해 일부 에피소드를 브런치에 올립니다.
내게 남자친구가 생겼다는 소식은 학과에 아주 빠르게 퍼졌다. 대다수의 반응은 “삭형에게 남자친구가 생기다니!”였다. ‘삭형’은 나의 별명이다. 반면 나와 가장 친한 친구는 아주 뜨끔한 말을 내뱉었다. “네가 주걸륜을 버리고 민 을 택하다니!” 주걸륜은 대만 가수로 당시 나의 최애였다.
덕질을 그만둔 건 아니지만 최애와 결혼하겠다며(최애의 의견은 묻지 않았다.) 떠벌리고 다녔기에 틀린 말도 아니었다. 다른 반응도 있었다. 어떤 이는 한참 어린 후배를 꼬신 양심 없는(?) 선배라고도 했고, 어떤 이는 민과 사귀어도 정말 괜찮겠냐고 물었다. 후자는 다른 과 친구이자 민의 선배였는데 학교에서 우연히 마주치자 반갑게 인사하더니 넌지시 민 이야기를 꺼냈다. “걔가 술버릇이 좀….”이 라면서 말을 흐리기에 나는 피식 웃었다. 워낙 마당발인 친구라서 온갖 소문을 들었을 터인데 술버릇만 이야기하다니. 나는 그 말을 듣고 오히려 안심했다. 민에게 술버릇 외에 심각한(?) 단점은 없는 것 같았다.
민의 술버릇은 나도 알고 있었다. 민의 술버릇이 뭐냐고? 일단 술에 취하면 사리분별을 못 한다. 예전에 만취한 상태로 커피전문점에 가서 햄버거 세트를 시켰는데 햄버거를 안 판다는 말에 크게 당황하더니 납득하지 못했다. 커피전문점 건너편에 햄버거 가게가 있었는데 아무래도 두 가게를 구분하지 못했던 것 같다. (나도 직접 본 건 아니고 들은 이야기다.) 물론 그게 다는 아니었다. 민은 술에 취하면 하늘을 이불 삼고 땅을 자리 삼으며 산을 베개 삼았다. 정말 아무데서나 잤다. 버스정류장 벤치에서 잠든 민을 다음 날 아침 지나가던 순경이 발로 차서(?) 깨워줬다고 한다. 쯧쯧.
나 또한 민의 술버릇을 직접 본 적이 있다.
연극팀과 엠티를 갔을 때였다. 다 함께 술을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갑자기 민이 다른 남자애와 주량 대결을 하는 게 아닌가. 실로 같잖고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그냥 내버려두었다. 대학생 때 아니면 언제 또 저런 흑역사를 적립하겠는가. (대신 나는 두 사람에게 소주 비용을 따로 내라고 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소주를 몇 병이나 마셨고,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되어서는 곧장 잠들었다. 다음 날 아침, 연극팀 학우들은 민에게 무슨 술을 그렇게 마시냐면서 한두 마디씩 했고, 술에서 깬 민은 몰래 이불킥이라도 했는지 갑자기 다짐의 말을 내뱉었다. 다시는 이렇게 마시지 않겠다고. 그 뒤로 민은 자신의 다짐을 지켰다. 인사불성이 될 정도로 술을 마시지는 않았다.
확실히 술버릇은 당시 민이 가지고 있던 단점 중 가장 큰 단점이었기에 친구의 반응도 이해할 수 있었다. 내 친구 가 저런 술버릇을 가진 사람과 사귄다고 하면 나도 비슷하게 반응했을 거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반응도 있었다. 학교에서 학과 선배와 후배를 마주쳤을 때였다. 선배가 날 보더니 “남자친구 생겼다며?”라면서 인사를 건넸다. 나는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고, 선배는 “근데 그 친구…” 라고 말을 뱉다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옆에 있던 후배 (이자 당시 선배의 여자친구)가 옆구리를 찔렀기 때문이다. 아니, 내 남자친구가 볼드모트도 아닌데 뭘 저렇게 조심스레 군단 말인가.
그때는 ‘뭐지?’ 하고 넘어갔지만 이런 일을 여러 번 겪으면서 선배가 내뱉지 못한 말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덕질만 하던 내가 26년 만에 ‘첫 연애’를 한 것보다 남자친구가 ‘북한 이주민’이었던 게 더 놀라웠던 거다.
그건 민의 주변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이때 민은 자신의 일상이나 생각을 노트에 콘티 형식으로 남기곤 했는데, 한 번은 내게 그 노트를 보여줬다. 나는 노트를 훑어보다가 민과 친구들의 대화 장면을 발견했다. 그림 속 친구 은 민에게 질문을 쏟아내고 있었다. 잘 지냈어? 여자친구 생겼다며? 까치래, 까치. 까치라고? 까치 여자친구는 어때? 그림 속 민은 친구들의 질문에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다. 나는 민의 머리 위에 적힌 “…”을 보다가 민에게 물었다. “까치가 무슨 뜻이야?” 민은 ‘까치는 남한 사람, 까마귀는 북한 사람’을 의미한다고 했다. 북한 이주민이 하는 말 중에 “까치는 까치끼리, 까마귀는 까마귀끼리”라는 표현이 있는데 북한 사람은 북한 사람과, 남한 사람은 남한 사람과 사귀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생긴 말이라고 했다. 왜 하필 까치와 까마귀냐 고, 그런 은유가 어쩌다 생긴 거냐고 묻자 민도 모르겠다고 했다.
“까치는 수가 많고, 까마귀는 수가 적어서 그런 게 아닐까?” 민은 막연히 추측할 뿐이었다. 나 또한 그림 속 민의 마음을 막연히 추측해 보았다. 그는 왜 친구들의 질문에 어색한 침묵으로 답했을까. 그도 나와 비슷한 경험을 여러 번 했던 거겠지. 누군가에게는 민이 대학에 입학해 처음으로 사귄 여자친구가 ‘두 살 연상’의 선배라는 것보다 ‘남한 여성’이라는 게 더 신기했던 것 아닐까? 나와 민은 까치와 까마귀였다. 남들에게 (심지어는 북한 이주민에게도) 우리의 연애는 종(?)을 뛰어넘는 결합처럼 보였나 보다. 우리는 그저 연애를 하고 있을 뿐인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