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달치 짐을 풀고
다시 1년 치 짐을 싸기 위해
한국으로 잠시 들어왔다.
언제나 그렇지만
챙겨도 챙겨도 뭔가 빠진 듯한
개운하지 않은 느낌이 참 싫다.
그러고 있으면 또 엄마가 와서
잔소리를 시작한다.
“으이고, 진작 했었어야지”
그럼 난 또 거칠게 받아친다.
“아, 쫌!! 내가 다 알아서 한다니깐 “
그렇게 나는 또 ‘금쪽이’가 된다.
하지만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엄마, 그래서 있잖아”
필리핀에서 있었던 시시콜콜한 일들을 얘기하며
엄마 옆에서 방언이 터져버린,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수다 쟁이가 되어버린다.
기다린 듯 기다리지 않은
공항으로 가는 날이 오고야 말았다.
극심한 울보인 나는
가족들이 공항에 나오는 게 싫다.
내가 울면서 출국장으로 들어가 버리면
우리 가족들은 내가 무사히 돌아올 때까지
우는 모습만 기억하며 걱정하실 테니까.
그냥 쿨 하게 집 앞에서 바쁜 척 헤어지는 게 나았다.
“택시 왔대! 얼른 갈게, 가서 전화할게! “
부산에서 서울 가듯, 나는 그렇게 또 떠났다.
나의 목적지는 호주 브리즈번, 비행기는 홍콩을 경유해서 브리즈번으로 바로 들어가는 편이었다.
첫 번째 비행기가 이륙했고
밥 먹고, 해리포터-마법사의 돌 한 편 보면
도착할 정도로 가까운 곳
홍콩 첵랍콕 공항에 무사히 착륙했다.
사실 여기까지도 별 생각이 없었다.
예전에 와본 적이 있기도 하고 만약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 해도 겨우 3시간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전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다음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었고,
곧 탑승구에서 이제 곧 탑승이 시작된다고 했다.
그런데,
줄을 서기 위에 간 곳에
사람들이 모여있는 모습을 보고
순간 멈칫했다.
나는 그날, 그 공항에서
그렇게 많은 숫자의 파란 눈의 외국인들을 처음 봤다.
이질감이란 게 이런 걸까.
나와는 전혀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들 같은.
그리고 불현듯 실감이 났다.
나는 사람들이 말하는
진짜 ‘외국’ 이란 곳에 가는 거구나.
갑자기 속이 울렁거렸다.
하지만 나는 이미 비행기에 오르고 있었다.
그냥 집에 갈까?
하지만 되돌리기엔 너무 늦었다.
‘에라 모르겠다’
내 옆자리에 아시아계 여성분이 앉는 것을
보고 나서야 나의 놀란 가슴이 조금은 진정되었다.
홍콩에서 브리즈번까지는 약 9시간
현지 시간은 우리나라보다 한 시간 더 빠르지만
계절은 정 반대인 곳,
‘그곳에서 앞으로 일 년간 어떤 일이 생길까? ’
조금 쉬면서 가고 싶었지만,
입국심사가 꽤나 엄격하다고 들었기에,
긴장이 돼서 눈을 붙일 수가 없었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더니,
나는 또 왜 이렇게 밖에서 사서 고생을 하고 있는 건지.
‘뭐 하러 왔냐고 물어봤는데 생각이 안 나면 어쩌지?
영어가 왜 그 모양이냐고 하면 어쩌지?
다시 집에 가라고 하면 뭐라고 하지?‘
유학원이 제공해 준
모범 답안을 보며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드디어 비행기가 브리즈번에 착륙했다.
두려운 마음으로
입국 심사대 앞에 줄을 섰다.
늦은 밤
아까 낮에 본 해리포터의 영화배우들처럼 생긴
세 명이 직원들이 방금 들어온 우리 비행기에서 내린 승객들을 심사하고 있었다.
왼쪽에서부터 차례로
헤그리드를 닮은 무표정의 중년 남자 직원
맥고나걸 교수님 같이
포근해 보이지만 깐깐할 것 같은 여성 직원
그리고…
스네이프 교수님을 닮은,
나 하나쯤 한국으로 돌려보내는 건
일도 아닐 것 같아 보이는 남자 직원..
그 짧은 순간 속으로 얼마나 빌었는지..
‘제발 제발, 스네이프만은 아니길 , 제발..’
언제나 불안한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절대 가고 싶지 않던 창구에 앉아있는
스네이프 교수님이 나에게 손짓했다
“Next! “
망했다.
"Passport please"
어색한 미소로 윗니 8개 정도를 드러내며
여권을 내밀었다.
다행스럽게도
예상질문에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들을 물었다.
“여기는 왜 왔습니까?
얼마나 있을 예정입니까?
체류는 어디에서 할 예정입니까?"
그를 보며 마지막 질문에 답을 했고
마치 20년 같은 2초의 정적이 흘렀다.
그가 나를 바라보았다.
도장을 찍었다.
그리고 나에게 여권을 돌려주며 말했다.
“Enjoy, Welcome to Brisbane.”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브리즈번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해냈다’
마음속에서는 함성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지만 저런 스윗함은 전혀 예상문제에 없었기에
그냥 어설프게 웃으며 여권을 받아 나왔다.
입국장으로 나오니
픽업 나오신 기사분이 기다리고 있었고
주차장으로 안내해 주셨다.
밤 11시가 넘은 시간.
공항 밖은 풀벌레 소리가 들릴만큼 조용했다.
그날 밤, 10월 초의 브리즈번은
우리나라의 4월 초 저녁 날씨처럼
서늘했지만 춥진 않았다.
딱 내가 좋아하는 날씨다.
그리고 아까 스네이프 심사관에게 하지 못한 말이 생각났다.
'Thank you.
I won't waste a single moment.'
'고맙습니다, 한순간도 헛되이 보내지 않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