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랜 B가 뭐였죠?

by 한그루

호주에서 첫 4주는 홈스테이에서 지내기로 했다.


현지 호스트 부부인 제프, 줄리와 함께

독일에서 온 마릴레나, 대만에서 온 윌리,

그리고 일본에서 온 카이와 한 집에서 지내게 되었다.


저녁시간은 혼자 조용하게 보내길 좋아했던 내가

가장 즐거워했던 건

아이러니하게도

그들과의 식사시간이었다.


한국에선 저녁을 늘 밖에서 먹는 게 익숙했던 나는

호스트 가족이 준비한 식사를 다 같이 둘러앉아 먹으며

얘기하는 것이 참 좋았다.

이렇게 집에서 여유롭게 집밥을 먹어본 게 언제였을까.


"How was your day?"

"오늘 하루는 어땠어?"


아직 서툰 영어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게 쉽진 않았지만

오늘 하루는 어땠는지 내일은 뭘 할 건지,

사소한 얘기들을 나누며 웃음이 가득했던 저녁시간.


하루 종일 쌓였던 어깨와 목의 긴장이

마치 냉동 인절미를 전자레인지에 돌린 것처럼

따뜻하게 풀어지는 듯했다.




드디어 학교 입학일,

전날 제프와 답사한 대로

안내된 시간에 맞춰 학교로 갔다.


필리핀에 있을 때 온라인으로 레벨테스트를 봤지만

인터넷 신호가 약한 탓에 결과 전송이 제대로 안되었다.

그래서

입학하는 날 다시 보기로 했다.


내가 신청한 코스에 대한 필수 레벨은

이미 필리핀 어학원에서 달성했기 때문에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 됐다.


관계자는 새로 나온 테스트 결과를 보고

내가 *테솔(TESOL) 과정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했다.


에세이 점수가 낮았던 게 큰 이유였다.

대신 중급 일반과정**(ELS) 4주를 이수하면

어학원 규정에 맞게

필수요건들이 갖춰지니 일반 과정을 먼저 등록하라고.


‘아니, 그런 게 어딨어요..’


큰일 났다.

그렇게 되면 내 모든 일정과 비용에 차질이 생긴다.


나는 곧장 사무실로 찾아갔다.


"저 필리핀 어학원에서 이미 중급 레벨 받았어요.”

“에세이가 문제라면,

어떤 부분이 부족한지 피드백 주실 수 있나요? “

“4주를 더 등록하면

제 예산이랑 일정이 완전히 틀어져요. “

“저 이거 공부하려고 호주까지 온 건데..."


불같이 타오르는 마음을

애써 꾹꾹 눌러가며 오목조목 따졌지만

사실 나는 처절하게 애원하고 있었다.


내 사정을 딱하게 여긴 한국인 담당자가

다시 레벨테스트 관계자에게 재검토를 요청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단호했다.


"일반 과정 4주를 듣지 않으면

테솔은 절대 못 듣습니다."


아닌 건 아니라는 거다.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매정한 사람들.


1 더하기 1의 출력값은 2인데,

나는 자꾸 3은 어떻게 안 되겠니?라고 하고 있으니,

그들의 입장에선 말이 안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정(情)’이라는 이름으로

가끔 예외가 가능한 한국사회에 익숙했던 나는,

처음으로 맞닥뜨린 차가운 현실에

길을 잃은 아이처럼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렇다.

‘원래 안되는데 오늘만 특별히’ 따윈 여기선 없는 거다.


또 감사했던 일들은 모두 망각한 채

나는 하는 것마다 왜 다 이럴까 하며

자책을 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머리가 어지럽고 식은땀이 났다.

어딘가 앉아야 했다.


‘플랜 B를 꺼내야 할 때다.’


하지만 플랜 B가 뭐였지?

시나리오에 전혀 없던 상황이라 답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무너질 수 없었다.


일단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테솔은 무조건 들어야 했다.

그게 내가 호주를 선택한 이유였으니까.

하지만 현실적으로

4주 과정을 더 들으려면 돈이 더 필요했다.

그때 당시, 결코 적은 금액은 아니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지금 파트타임으로 일할 수 있는 곳을 구해

최대한 빠르게 일을 시작하고

과정이 끝나는 10월 말부터

풀타임으로 전환해 빡쎄게 벌어서

수업료를 충당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일을 어떻게 구할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봤다.


그 당시 호주에서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가진 사람들은

'뜨내기' 취급을 받기도 했다.


한 사업장에서 합법적으로는 6개월밖에 일을 못 하는 게

그 이유였다.


고용주 입장에서는

교육에 거의 1개월, 적응에 3개월.

제대로 일할 만하면 이제 나가야 할 시간.


당연히 워홀러를 선호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이걸 몰랐다.

아니, 알았어도 ‘나는 다를 거야’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나는 국내에서 최고로 손꼽히는 외식 프랜차이즈 기업에서 일했고, 아웃백, 피자헛, 맥도널드 등 나름 이름 있는 글로벌 체인에서도 경쟁력 있는 경험이 있었으니 말이다.


일단 브리즈번 시내에

스타벅스가 2개 있으니 거기서 하면 되겠지?


또 자만했다.


앞으로 어떤 일들이 벌어질진

상상도 못 한 채로..




*TESOL(Teaching English to Speakers of Other Languages, 테솔)은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사람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국제영어교사 양성을 위한 교육과정 및 자격증이다.

**ESL (English as a Second Language) 모국어가 아닌, 외국어로 영어를 익히려는 학생들을 위해 개설된 교육 과정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