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가 꼭 한 번은 우리 다시 만나자

by 한그루

어느덧 필리핀 8주 코스도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 사이에 나는

정기 레벨 테스트로 '초중급 반'인

Low-Intermediate로 배정받을 수 있었다.


수업을 들어보니,

왜 내가 처음부터 베이직 반으로

배정이 먼저 되었는지 이해가 되었다.

선생님들은 너무 쉬운 부분들은 굳이 하나하나 설명해 주지 않았다.

문제는 그 너무 쉬운 부분들도

한 달 전에 나였다면 몰랐을 텐데,

그놈의 체면 때문에 또 대충 알아듣는 척만 하고

넘어갔을 것이다.


베이직 반에서의 4주가 나에게 큰 자극이 된 건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unfortunately

그게 끝이 아니었다.

호주에서 테솔 과정에 들어가려면

여기서 적어도 '중급' - Intermediate의 실력이

있어야 하기에

여전히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떠나기 전 마지막 레벨 테스트에서

한 단계 더 레벨업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기숙사, 도서관 귀신 신세는 계속되었지만

수업이 끝나면 방으로 바로 가지 않고,

밤공기를 마시며 어학원 내에서 산책도 했다.


같은 반 친구들

일본에서 온 리에,

대만에서 온 캐롤, 그리고 그녀의 친구 한나,


아시아 3국에서 온 우리는

모국어는 달랐지만

우리의 공용어인 영어로

서툴지만 진솔한 대화를 하며

어느새 가까워졌다.


취업, 연애, 영어,

이런 건 정말 만국 공통이구나.


그리고 일본인 룸메이트.

한국을 사랑했던 그 아이가

코스를 마치고 먼저 떠난다고 했다.


"그때 미안했어."

"언니, 괜찮아요."


그렇게 말했지만

여전히 공기가 어색했다.


그렇게 모질게 할 필요는 없었는데.


뱉어버린 말은 주워 담을 수가 없다.

인간관계도,

이렇게 또 하나 배운다.


한국 학생들이라면 철벽을 쳤지만,

마지막 일정이 다가올수록

얘기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져서

왜 여기에 왔는지 들을 수 있게 됐다.


세계 여행을 하던 중

영어를 더 잘하기 위해 일정을 잠시 바꾼 청년,

토익점수는 잘 나오지만

회화가 힘들었던 학생들

24살의 나처럼 대학졸업 후

영어 공부하는 취준생들,


모두가 다른 꿈을 꾸고 있지만

꿈을 이루기 위해 여기까지 오게 된 우리들


지금은 다들 꿈을 이루고 잘 살고 있을까?


드디어

8주 차 과정이 마무리되었고,

최종 레벨 심사만 남았다.


나는 그동안 공부한 것들을 모두 쏟아내듯

최선을 다했고

마지막 테스트가 끝났다.


결과는

점심시간 이후 벽에 붙여진다고 했다.


점심을 제대로 먹었을 리가 없다.

점심시간 전에 알려줘야 제대로 밥을 먹죠.

이 인정사정없는 사람들아..


복도에 사람들이 몰렸다.

리에, 캐럴, 한나도

나처럼 긴장한 표정이었다.


드디어 결과가 붙여졌다.


천천히 벽에 다가갔다.


‘제발.. 제발.. 제발 중급…..‘


그리고

마침내 내 이름을 찾았다.



Misong - Intermediate (중급)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해냈다. 진짜 해냈어.'


베이직에서 중급까지

지난 8주 동안의 모든 노력을

보상받는 순간이었다



드디어 마지막날,


수료증을 받고

짐을 정리하고,

리에, 캐롤, 그리고 한나와 시내 나들이를 나갔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뭔가 애틋했다.

애증의 필리핀..


택시를 타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

바깥 풍경을 보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필리핀 세부에 다시 오는 날이 있을까?’


막상 떠나려니

너무나도 아쉽고,

또 호주에서 처음부터 적응할 생각을 하면

설렘도 있었지만 두려움도 컸다.


숙소에 다시 도착했다.

공항으로 가기 위해

예약한 택시가 곧 도착한단다.


셀카를 한 76장 정도 찍고 나서야

우리는 헤어질 수 있었다.


‘얘들아,

고집 불통이었던 나의 마음을 열어준 너희들 덕분에

지난 2개월이 외롭지 않았어.

너희들이 세상 어디에 있든 항상 응원할게.‘


내 인생 마지막 필리핀이라고 단언했지만


아무 생각하지 않고

오직 공부에만 매진할 수 있었던

지난 2개월이

언젠가 또 삶이 힘들어질 때면 그리울 것 같다.


친구도, 공부도, 날씨도,

그때의 열정이 가득했던 나도,


살아가다가 우리 꼭 한 번은 다시 만나자.

Thank you so much for everyt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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