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세부
내가 2개월 동안
스파르타식 영어를 배울
기숙 어학원에 도착한 지
만 하루가 지났다.
오늘은 레벨 테스트가 있는 날이다.
부끄럽지만
사실, 필리핀 어학연수는 이번이 두 번째다.
24살 때 대학 졸업하고
취업 준비하며 한 번 왔었는데,
그때는 한국인 친구들만 잔뜩 사귀어서
영어가 아닌
서울말을 배워 돌아왔다.
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영어만 확실하게 공부해서
호주 어학원 테솔(TESOL) 반에
한 번에 들어가는 게
내가 필리핀에 다시 돌아온 이유다.
반 배정 레벨 테스트는 생각보다 어려웠다.
결과를 기다리는데 은근히 긴장되고
손에 땀이 났다.
'아무리 못해도 중급은 되겠지.'
결과 - 베이직
'뭐어어? 베이직?
내가 아는 그 very 기초반, 베이직?‘
여기까지 와서 또 베이직만 하라고?
베이직만 할 거였으면 한국에서 했지.
너무 화가 나서 곧장 사무실로 달려갔다.
"테스트 결과가
중급과 초급의 경계에 있었어요.
이럴 경우 초급으로 가는 게 맞습니다.
그래도 원하시면 중급으로 보내드릴게요."
이미 난 자존심이 상했다.
얼굴에 불이 날 것 같았다.
"정말….
하…
베이직할게요 그냥."
‘베이직’ 아래에 ‘인트로’가 있다고 했지만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화가 나기도 했고
부끄럽기도 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대신 다짐했다.
'영어 따위로 필리핀에 오는 건
이 두 달이 진짜 내 인생에서 마지막이다.'
그리고 시작된 나의 독기
나는 정말 유난스럽고 지독했다.
한국인들한테도 한국말을 쓰지 않았다.
그렇다고 내가 영어로 말을 엄청 잘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되든 안되든 일단 입을 열면 무조건 영어로만 말했다.
한국인 학생들도 내가
일본이나 대만 사람인 줄 알았다고 했다.
대만 룸메이트가 떠나고,
20살 일본 룸메이트가 들어왔다.
내가 한국 사람인 걸 알아채고는
"언니~ 내가~ 그러니까~"
한국 드라마에서 배운 말을
신나게 쏟아냈다.
순간 화가 치밀었다.
'나
너랑 한국어로 수다 떨려고
회사까지 그만두고
여기 와있는 거 아니야,‘
그리곤 단호하게 말했다.
"Sorry, but I don't want to talk to you in Korean.
Please speak in English."
“미안하지만 나는 네가 나에게 한국어로 말하는 걸 원치 않아. 영어로만 말해줘.”
어떡하지?
사슴 같이 예쁜 눈망울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우리는 이곳에 언니, 동생 만들러 온 게 아니니까.
일단 국위선양은 못했다.
아침 6시 반 첫 단어 시험부터
듣기, 읽기, 쓰기, 1대 1 수업
저녁 식사 후 야간 자율학습
그리고 문장 외우기 시험까지,
나의 하루는 영어로 가득 찼다.
마지막 일정이 끝나고
저녁 9시에 방으로 돌아오면
다음 날 단어 시험을 준비했다.
확실히 20대에 비하면
암기력이 많이 떨어져서
어린 친구들보다 다섯 배는 더 해야 했다.
단어 시험에 떨어지면
재시험을 보면 그만이었지만,
초고령자 그룹에 속했던 나로서는
그게 너무 부끄러워 기를 쓰고 외웠다.
외출은 일주일에 한 번, 3시간.
빨리 나갔다 와서 기숙사로 들어와
다시 책을 펼쳤다.
그래머 인 유즈 1권이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봤다.
밤에는 아무도 없는
공용 공간에 가서
소리 내어 읽고 또 읽었다.
'기숙사 귀신', '이 구역의 미친놈'.
그런 소리를 들어도 상관없었다.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릴 시간에
단어 하나라도 더 확실히 외우는 게
중요하니까.
그렇게 한 달이 지났을까.
드디어 피부로 이해되기 시작한
현재완료 진행형.
‘You have been doing great’
그래,
나는 잘하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