립스틱 짙게 바르고

by 한그루


브레들리.

50대 정도로 보이는 호주인 선생님.

학생들 사이에서는 "인사도 안 받아주는 무서운 선생님"으로 유명했다.


그 브레들리 선생님이 오늘 내 영어 수업을 참관한다.

맨날 검은색 박스티에 청바지 하나로 버티던 내가

브리즈번으로 온 지 약 4개월 만에

화장도 하고 옷도 차려입고 뾰족구두도 신었다.

오랜만에 빨간 립스틱도 발랐다.


‘오! 너 오늘 진짜 예쁘다’

라는 소리를 기대하며

또각또각 도도한 구두소리와 함께

활짝 웃으면서 교실에 들어갔다.


'역시, 모두가 쳐다보는군, 나 아직 솨라있네'


그때 친구 하나가 얼른 달려왔다.

그리고 그녀가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야! 너 치아에 립스틱 묻었어."


그 친구의 입김이 아직도 느껴진다.

순간 얼굴에 불이 날 것 같았다.

그래도 빨리 말해줘서 고마워 친구야.

하마터면 이대로 학생들을 만나러 갈 뻔했네.


오늘 60분 수업의 학생이 되어주실 분들은

모두 외부에서 모집되었다.


내가 준비한 수업은 듣기,

그리고 난이도는 초중급

노래를 들으면서 빈칸을 채워보는 수업을 준비했다.

노래는 원디렉션의 'One Thing'

'What is your One Thing'이라는 주제로

여러분들께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인가 라는 내용이었다.


교실은 곧 만석이 되었다.

아무도 안 오면 어떡하나 걱정했는데

원디렉션의 효과 때문인지

20명 수용 가능한 교실이 가득 찼다.

훈훈한 영국보이그룹의 사진을 쓴 게 화근이었던 건지

생각 보다 인기가 높아서 더 이상 학생을 받지 못해

다른 교실로 돌려보내야 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리고 저 쪽 구석에 앉아

나를 잡아먹을 것처럼 쳐다보는 브레들리 선생님..


수업이 진행되었고,


"Good afternoon, everyone!"

"안녕하세요 여러분"


한여름인데

혼자만 영하 30도에 있는 것처럼

떠..떠.. 떨리는 목소리로 수업을 시작했다.


"Today, we're going to listen to a song called One Thing."

"오늘 우리는 원디렉션의 원띵이라는 노래를 들어보려 합니다."


앞에 있는 학생 한 명이 질문했다.

"What does 'One Thing' mean?"

"원띵이 무슨 뜻인가요?"


분명 준비한 말이었는데 생각이 안 난다.


"Ah! That's what we are going to learn today"

"아, 그게 오늘 우리가 배울 내용이에요"


간신히 위기를 넘겼다.

아니나 다를까 브레들리가 뭔가 적는 소리가 들렸다.


만화에서 보는 것처럼 침을 꿀꺽 삼켜졌다.


혹시라도 내가 틀리는걸 학생들이 알아챌까

긴장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명색이 선생님인데

학생보단 잘해야지 라는 생각으로

몇 번이고 정신을 차렸다.


60분은 생각보다 빨리 지나갔고

드디어 첫 수업이 끝났다.

넓은 교실에 브레들리 선생님과 나, 둘만 남았다.


"Sit down please."

"앉으세요"


노트를 챙겨 앉았다.

브레들리는 말없이 나를 쳐다봤다.

그의 파란 눈동자가 오늘은 유난히 더 차갑게 보인다.


먼저 그는 나에게

오늘을 스스로 몇 점짜리 수업으로 평가하는지,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인지 물었다.

나는 10점 중 5점 정도 된다고 말했다.

생각보다 긴장을 많이 해서 그런 것 같다고 했다.

‘아이 워즈 베리 널버스 브레들리!’


그리고 그는 나에게 노래의 선정이유를 물었다.

나는 인기가 많은 노래이기도 하고,

오늘의 주제와 잘 맞기도 해서 선택했다고 했다.


선생님은 깊이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날숨에

리스닝 수업을 할 때는 그런 유행가보다는

비틀스와 같은 고전이 좋다는 조언을 시작으로

문법 설명시 내가 놓쳤던 부분,

어떤 부분을 예시로 들면 좋을지,

질문은 어떤 식으로 하면 좋은지,

마무리를 할 때 어떤 식으로 정리하며 끝내는 게 좋은지 등.

두 장을 빼곡히 채운 내용들을 나에게 쏟아내셨다.


아, 그래서였구나.

그는 우리의 인사를 무시한 게 아니었다.

"Hiya" 같은 너무 캐주얼한 인사가 아닌,

"Good morning.", "Good afternoon."처럼

제대로 인사할 수 있도록 가르치고 싶었던 거다.

어학원에 있는 동안 만이라도.


그리고 우리가 제대로 영어를 배우고

꼭 영어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좋은 가르침을 줄 수 있도록

하나하나 진심으로 조언해 주셨다.


끝으로 그는

나의 프로페셔널함을 칭찬해 주셨다.

선생님으로서의 복장을 잘 갖추고

실수해도 당황하지 않고 끝까지 웃으며

강의에 온 학생들에게 예의를 갖췄다고 해주셨다.


브레들리가 평가한 나의 수업은

10점 만점에 6점.

그래도 예상보단, 1점 더 많이 주셨다.

그렇게 나의 첫 60분 수업과

우려했던 브레들리의 피드백이 끝났다.


확실히 내가 몰랐던 부분들이었고,

꼭 개선이 필요한 내용들이었다.


좋은 피드백이란 이런 거 아닐까?


나는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제삼자가 보면 한눈에 보이는 것.

그리고 굳이 말 안 해도 되지만,

상대방을 위해 말해주는 것.


마치 치아에 묻은 립스틱처럼.


이 어학원에서

가장 무서운 선생님에게 피드백을 받고

다음 수업을 준비한다고 생각하니

이젠 무서울 게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