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수업 전날 밤.
교안을 펼쳐놓고 한참을 들여다봤다.
9주간의 테솔 과정.
3번의 실제 수업.
선생님들께 받은 피드백,
벌써 마지막이라니.
시간 참 빠르다.
나의 마지막 90분 수업은 리딩,
주제는 "Agony Aunts"
영국의 고민 상담 코너에서 착안한 수업이었다.
사연자들의 고민을 읽고, 함께 조언을 나눠보는 시간.
드디어 수업 당일.
학생들에게 인사했다.
"Good afternoon, everyone!"
확실히 목소리가 많이 안정되었다.
첫 강의 때 나 혼자만 영하 30도에 있는 것처럼
오들오들 떨던 것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다.
"Today, we're going to read some problems and give advice together."
“오늘은 다른 사람들의 고민을 읽어보고 조언을 해주는 시간을 가져볼 거예요.”
주어진 고민들을 하나씩 읽어 내려갔다.
아직 첫 직장을 구하지 못한 청년.
가족을 떠나온 유학생.
미래가 보이지 않는 20대.
서툰 영어로 조언과 위로를 전하는
그들의 목소리가 따스하게 느껴졌다.
수업이 마무리가 되어갈 때 즈음.
내가 평소에 좋아했던 약 1분짜리 영상을
준비해서 함께 보았다.
미국의 유명한 드라마 한 장면
칼럼니스트인 여주인공이
특별 모델 제의를 받고 런웨이에 선다.
모델들에 비해 키도 작고, 제공받은 옷도,
헤어스타일도 전부다 마음에 안들었다.
그런데 가장 최악은 그다음이었다.
런웨이 한가운데서, 그것도 수백 명이 보는 앞에서,
그 여주인공이 마치 로드킬 당한 개구리처럼
납작 엎드려 넘어진 것.
영상을 멈췄다.
"What would you say to her”
“그녀에게 무슨 조언을 해주고 싶어요? “
학생들이 하나같이 말했다.
“keep going “
“Don’t give up”
나는 다시 재생 버튼을 눌렀다.
그때 영상 속 여주인공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선택해야 했다.
런웨이에서 도망치며 치욕 속에 무너질 수도 있었고,
아니면 완벽하지 않은 나를 받아들이고
끝까지 걸을 수도 있었다. “
그리고 여주인공은 이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일어나 걸었다.
왜냐하면 현실 세계에서 사람들은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계속 앞으로 나아가니까.“
당당히 런웨이를 마친 여주인공을 끝으로
영상을 마쳤다.
학생들은 멋진 결말에 환호했다.
그 영상을 통해 전하고 싶었다.
우리도 다르지 않다고.
살아가면서 넘어지고, 실수하고, 부끄러울 때도 있지만,
계속 걸어가면 된다고.
그런데 우리는 남에게는 관대하면서
정작 자신에게는 가혹하지 않냐고.
아마도
"포기하지 마세요, 계속 가세요"는
그 여주인공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이렇게 수업을 마무리했다.
영어는 우리의 모국어가 아니기에 실수할 수도 있고,
항상 완벽할 필요도 없다고.
그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계속 꾸준히 해 나가는 것이라고.
문득 지난 시간들이 떠올랐다.
홍콩 면접에서 비참하게 탈락했을 때
테솔반에서 거절당했을 때
이력서 70번을 넣어도 소식이 없었을 때
통장에 단돈 4달러 남아 있었을 때
나는 계속 넘어졌고 지금도 넘어지고 있다.
하지만 그때마다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면
오늘의 영광도 없었다.
"Wherever you are, I wish you all the best.
Thank you for joining me today.”
“여러분들이 어디에 있든, 건승하시길 바랄게요.
오늘 수업에 참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목이 메었다.
교실이 서로를 응원하는 박수로 가득 찼다.
그렇게 학생들이 떠나고
밖에서 기다리던 내 동료들이 들어왔다!
“끝났다!!!!! 진짜 끝났어. “
우리는 얼싸안고 폴짝폴짝 뛰면서
성취의 행복을 만끽했다.
드디어 수료식,
그 어마어마했던 9주간 대장정이 막을 내렸다.
감사하게도
나는 우수 학생으로 선발되어 어학원 인턴 교사로
5주간 일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우리는 수료증을 받고, 빈 교실에 모여 앉았다.
“이제 뭐 할 거야? “
“집에 가야죠”
“빡세게 돈 벌어야지”
각자의 다음 여정을 이야기했다.
우리는 쉽게 자리를 뜨지 못하고 눈물 젖은 식빵,
신라면과 같은 지난 추억들을 회상하며 깔깔거렸다.
아쉬운 발걸음으로
그렇게 우리는
아기 새들이 둥지를 떠나듯, 정들었던 어학원을 떠났다.
찌질했지만 찬란하게 아름다웠던
우리 9주의 시간들을 뒤로한 채.
*인용: Sex and the City, Season 4 Episode 2 "The Real Me"
https://youtu.be/DTDh8CeDW6c?si=D2qirpDugX8I45cl
학생들과 함께 시청했던 영상을 독자분들과도 공유합니다. 약간의 생활 비속어가 포함되어 있으니 참고 부탁드립니다. (1분 30초)